맹자(孟子)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해 시장 곁을 떠났는지 모르지만 나는 시장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때로 딱히 구입할 물건이 없고 딱히 할 일이 없더라도 이곳저곳 둘러보기를 좋아한다. 혼자일 때도 있고 친구와 같이 일 때도 있다. 시장에 가서 분주한 사람들 속에 섞이면 활기참을 느낄 수 있고,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시장이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한동안 괴질 코로나 여파로 시장이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웠는데 요즈음 다시 시장에 사람들이 모이고 활기를 되찾고 있어서 좋다. 내가 주로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고대중국의 진시황(秦始皇)도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에서 불로초를 찾게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죽음이란 이같이 언젠가는 맞아야 할 일이고, 반드시 가야할 인생의 길이지만 아무자리에서나 죽음을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듣기에 유쾌한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지인이나 친척집의 아이 돌잔치에 참석했을 때, “튼튼하기가 장군감이다”라거나, “연필 집는 것을 보니 장차 대학자가 되겠다.”는 등의
‘주막집 개가 사나우면 주막집 술이 쉰다.’는 말이 있다. 술손님들의 발길이 끊기기 때문이다. ‘미소 짓지 않으려면 가게 문을 열지마라.’ 유태인들의 속담이다.어느 날인가 집사람이 초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식당에 친구들과 함께 들렸는데, 계산을 하고 나가는 손님이 “다시는 오지 못할 집이군”하며, 불만에 가득 찬 모습으로 나가더라는 것이다. 종업원이 쌀쌀맞게 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그 식당이 머잖아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다.오늘은 모처럼 비가 내리면서 땅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날씨마저 푸근한 것이 곧 봄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는 몰라도 반드시 죽는다. 이는 인간의 숙명이다. 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에 병을 앓다가 죽을 수도 있고,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거나 삼가왔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하지만 노년에 이르면 다르다. 필자는 술자리에서나 몇몇이 같이하는 산행 길에서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수시로 보고 들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죽을 때
“5분만 더, 5분만 더.” 아침잠자리에서 꾸무럭대다가 출근버스 타러 나갈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우유 한잔으로 밥을 대신하며 허둥대던 젊은 시절이 엊그제 같은 데, 세월이 어느덧 덧없이 흘러 언제부턴가 새벽잠이 사라졌다. 옛날에 “노인들은 일찍 기침을 한다.”는 말을 들었었지만 왜 그런지를 몰랐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를 직접 겪고 있는 것이다.사람은 잠을 잘 자야 건강하다고 하는데, 짧게 자더라도 푹 자는 단잠을 자야 좋다고 하는데, 깼다 잤다하는 선잠마
벌써 봄이 오나보다. 나이 들어가면서 세월의 빠름을 부쩍 느낀다. 해 바뀐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입춘이 지났다. 세월은 물처럼 흐르고, 쏘아놓은 화살과 같다더니 정녕 그런 것 같다.햇살 잘 드는 베란다에는 벌써 해피트리가 작은 나팔모양의 꽃을 피우고, 긴기아난도 수많은 꽃대를 올리고 있다. 베란다에는 벌써 봄이 온 것이다.세월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쉬는 일도 없이 깊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른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히지도 않는다. 우리네 인생도 세월 따라가야지 별 수는 없지 싶다. 흐르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고,
벌써 가을이 깊어 졌나보다.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 느티나무 잎들이 붉스레 물들어가고 은행나무 잎들도 누르스름해지고 있다. 가을비 내린 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도는 것도 확연히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은 한낮 늦더위의 기승도 만만치가 않다. 엊그제는 옛 직장동료들과 모처럼 보문산 산행을 하는 날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보문5거리에서 버스를 내려 약속 장소인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육각정까지 가려고 마을안길을 걷다보니 주변 환경이 많이도 바뀌었다. 좁던 골목은 차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가 뚫리고, 울긋불긋한 깃발이 꽂혀 있
8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 오후, 성글은 갈대발처럼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전등사 답사를 마친 후의 과음 탓으로 밤을 새고도 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친구네와 두 가족이 비교적 이른 아침을 먹고 교동도로 향했다. 연산군 유배지를 보기 위해서다. 초지대교를 건너 경기도 쪽 도로를 따라서갔다. 내비게이션이 그리 안내했기 때문이다. 북부 경기도의 도로사정이 그리 좋은 것만도 아니었지만 여행하는 몸들이라서 서둘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왕복 4차선 강화대교를 건너 시가지 외곽도로를 따라 좀 더 직진해가니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
청백리는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아니 그 이전 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평생 새기며 살았다는 최영 장군도 청백리임이 분명하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네 임금을 섬기며 우의정까지 지낸 유관(柳寬)도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어찌나 청렴한지 울타리조차 없는 집에서 살았는데, 어느 해인가 비가 한 달이 넘게 내리자 집이 여기저기 줄줄 샜다. 우산을 받쳐 든 유관이 “우산조차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를 어찌 견딜꼬?” 하며 걱정했다고 한다. 얼마 전 통장에 15억원
넥타이를 단정히 맨 친구가 사진 속에서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젊었을 때의 모습이다. 코로나 때문에 서너 명씩 나누어 절을 하려는데 “친구들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왜 거기 있어?” “당신은 왜 거기 있어?” 친구의 부인이 소리죽여 흐느낀다. 조문객을 맞는 친구의 두 아들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얼이 빠진 듯 망연자실 서있다. 비보를 접한 건 월요일 카톡을 통해서였다. 전날 고등학교 동창이 세상을 등졌다는 부고가 떴다. 말이 없고 점잖던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단톡방은 이내 불이 났다. 그동안 코로나 여파로 동창모임마저 중단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제3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나 다름없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써야할 글을 쓰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또 알아야 할 진실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회는 얼마나 갑갑하겠는가.폭군으로 이름난 연산군은 신하들의 충언이 두려워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게 했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60년대 말∽70년대 초 만해도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농경사회였다. 농촌은 지금과 달리 인구가 무척 많았다. 3대가 한 집에 사는 경우도 많았고, 드물게는 증조부나 증조모가 생존해 4대가 함께 살기도 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들을 자식들이 봉양해야 했고, 핵가족이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던 시대였다.노인들은 마을의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아이들이 어른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어요?”하고 깍듯이 인사해야 했다. 아이들끼리 싸움을 하다가도 어른들이 나무라면 그쳐야 했다. 호통이 무서웠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