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5일장에 가신 어머니를 동구 밖 고갯마루에서 해가 어둑해 질 때까지 기다리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어머니께서 머리에 이고 오시는 장 보따리가 정겹기만 한 그때의 5일장은 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통수단이었다.옛날의 5일장은 근처의 지역들이 장날을 달리 정하여 열렸으며, 이장에서 저장사이의 거리는 보통 걸어서 하루 정도였다고 한다. 보부상들은 장터를 돌며 물품을 팔았으며, 장터에는 좌판을 열 공간 이외에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과 같은 공간이 있었고, 장꾼들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국밥집과 국수집 같은 음식점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는 1974년 당시 대전 천 복개공사와 함께 각 4층과 8층 규모로 건축되어 대전역과 함께 원도심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는 대전의 페션을 선도하였으며 대전의 상징 건물로 자리하였고 부설 공원은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와 만남의 장소, 그리고 소공연장으로 추억을 함께 했던 곳으로 사랑받던 곳이다.목척교(木尺橋)는 6.25동란 땐 서울 등지에서 남하한 피란민들이 생이별한 가족 친지를 찾느라 목척교로 모여들었던 것. 피란 공간에서 애환의 다리로 유명세를 탄 때문인지 우리 가요사 에도 목척교는 흔적을
오랜 세월 잘 숙성되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 좁은 골목길에 하하 호호 웃음이 넘치며, 된장찌개 구수한 내움이 담 넘어 풀풀해도 행복 바이러스가 넘치는 달동네, 그곳의 속살 속에 배어있는 곰삭은 향을 호흡해보자.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지게와 낫 그리고 고무신이 전부였던 빈곤의 나라. 국민소득 66 달러(지금으로 환산1,000달러), 그 고난의 시대에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역사와 추억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 대동산1번지 달동네가 그 추억의 여운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고소한 이야기가 진동 하는 곳
새벽 4시쯤이면 느낌으로 눈을 뜬다. 일상에 특별함이 없으면 대청호와 함께한다.물안개 자욱한 대청호를 그리며 카메라 가방을 챙긴다. 행여 가족들이 깰라, 까치발로 살금살금 나와서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 마음은 벌써 대청호에 가 있다. 주산동 고갯마루를 지나 추동마을 앞을 달릴 땐 코끝에 상쾌한 싱그러움이 내제된 끼를 불러낸다. 거주지에서 대청호까지는 약 10km, 10여분이면 계족산 중턱에 도착한다.오늘은 자연의 신비한 유희를 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먼동이 희미하게 터오고 있는 백골산과 채봉골 자락 위로 운해(雲海)가 깔려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