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주말에 친구들과 산행을 했다. 이까짓 가랑비쯤이야 하고 집을 나섰다. 대전 둘레산잇기의 마지막 코스인 장수봉은 나즈막하다. 산괴불주머니풀은 아직도 연녹색 잎에 누런 꽃을 달고 가을의 끝을 버티고 있다. 이파리에 매달린 물방울이 애처롭다. 촉촉하게 젖은 길 위에 깔린 낙엽 때문에 경사가 진 등산로는 미끄럽다. 안개인지 가랑비인지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하다. 그래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걷는 기분은 상쾌하다. 오늘이 입동인데 또 이 한 절기를 보내며 동창들과 늦가을을 즐긴다. 운무(雲霧)사이로 뿌리공원이
첩첩산중에 나무들만 무성하고 빼꼼히 보이는 하늘로 흰구름이 쏜살같다. 굽이굽이 능선을 따라 깊게 이어진 계곡은 물소리만 들리지 흐르는 물은 종적도 없다. 한참을 올라 쉼터에서 냇가를 내려다보니 저 아래에 물보라가 보인다. 그 깔막진 비탈에 오래된 적송이 중심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더운 가슴을 쓸어준다. 휴가차 십 년 만에 찾은 불영(彿影)계곡은 여전하다. 산도 나무도 그대로인데 나만 구름처럼 흐르다 돌아온 것 같은 감회가 인다. 영월로 가는 길은 내리계곡을 따라 꼬불꼬불하고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이 산을
영귀대 입구에 있는 소나무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여전히 그 자리에서 손님을 영접하듯 구부리고 서 있다. 동로사 뜨락의 연분홍 매화가 만발하여 칙칙한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언제 심었는지 나이가 얼마인지 모르는 이 나무는 이젠 노쇠해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한다. 조부와 선친의 체취가 오롯이 배인 이곳은 나무와 풀들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성리학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고 평생 이곳을 지키다 떠나셨던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오적당(吾適堂)도 굳건히 서 있다. 정신없이 변해가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렀던 구한말의 전형
지난 주말 오랜만에 동창들과 모임을 가졌다. 전국의 맛 집, 명소를 찾으며 구경 겸 미각(味覺)을 동시에 즐기는 친구들과의 모임이었다. 이젠 거의 은퇴하고, 어떻게 남은 인생을 보낼까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도 하고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지방에 사는 친구의 농장에 들러 사는 모습도 보고 오랜만에 회포도 풀었다.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느라 임시 거처에 살며 또 다른 인생 준비를 하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어쨌든 사람은 활동하는 자체가 중요하고 그런 모습이 훌륭해 보인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간 여유가 있어 아늑하고 정갈한 모
설날 차례 상(床)앞에 모인 가족들을 대충 보니 이십 여 명은 될 듯하다. 막내가 환갑(還甲)이니 우리 일가(一家)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셈이다. 부모님은 모두 가고 안 계신다. 남은 자식들이 조상을 기리고자 이렇게 모였다. 그리고 서로가 친족 간 임을 확인하는 자리다. 위패로 모셔놓은 부모님의 자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당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손(曾孫)까지 모여 고개를 조아린다. 지방지에 써 놓은 이름 석 자가 모두다. 이게 인생이고 우리가 어찌 살아야할 지를 말씀해 주신다.성묘를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자주 띄질
차창 밖으로 지나는 하늘, 산, 들, 사람 사는 고샅고샅 등의 풍경이 다양하다. 들녘은 바둑판처럼 잘 짜여진 농경지의 구획이 선명하다. 언젠가 외국에서 오랜만에 귀국해 여행을 같이 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아기자기한 조국의 산천을 돌아보면 눈물이 난다고. 뽀송뽀송하고 상쾌한 공기 맛은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느껴 볼 수 없는 기분이었을 것이다.부산의 오륙도 앞바다는 흰 거품이 갯바위를 때리며 높은 파도로 어수선하다. 거센 물보라가 바람에 날려 안경에 이슬이 맺히듯 튀어 붙는다. 오륙도 해파랑길을 움츠리고 걷다보니 언덕에 펼쳐진 야
해가 남쪽으로 기울며 가을 내음을 풍기나 싶더니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감나무 잎은 된서리가 내려 단풍도 들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1월의 문턱을 넘었다. 청초한 구절초 꽃은 이럴 때 더욱 아름다우니 춘풍매화도 부럽지 않다. 찬 가을에 희고 고결한 꽃모습은 어머님의 흰 치마적삼을 보는 듯하다. 길모퉁이에서, 산등성이 외진 곳에서, 아니면 들판의 둔덕에서 흔들거리며 겨울을 맞는, 그 하얀꽃이 너무 아름다워 서럽기도 한 구절초는 우리 어머니들의 아픔을 달래주던 들국화이다.가을 들녘에서 가녀린 꽃잎의 단아한 모습으로
만인산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해 깔막지지만 주변으로 나 있는 산책길은 평평한 숲길로 시민들의 호응이 좋아 많이 찾는 곳이다. 높은 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서 하늘을 덮고 그늘을 만들어주니 더 할 나위가 없다. 길 중턱에 만들어진 쉼터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의 놀이터다. 그늘 아래 삼삼오오 마주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여유 있는 말년도 보기 좋지만 그런 장소를 제공해 주는 이곳 자연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친구인 셈이다. 숲길을 느긋하게 거닐며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여 마신다. 나무가 빽빽하고 이파리가 무성하니 그늘의 연속이다.
삼엄한 경비를 지나 민통선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묘했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었던 사람들이 선을 그어놓고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라니.....국경을 없애고 국가 개념도 모호해지는 현실의 서방(西方)과 비교하면 별나다. 오랜만에 최전방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군 제대 후 삼십 수년만이니 감회가 새롭다. 자식 같은 후배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북녘을 주시하며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정겹고 또 안타까운 마음도 교차한다.녹슨 철조망 너머의 북녘 땅은 긴장감을 준다. 그 너머엔 온갖 풀과
친구들과 정선(旌善) 5일장을 구경할 겸 나들이를 떠난 버스 안은 모두 들떠 있다. 5월의 신록(新綠)은 그 기분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편안한 마음으로 머리도 식히고 게다가 힘들게 산에 오를 일도 없는 날이다.박달령(朴達嶺) 휴게소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돌아보며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깊숙이 들여 마신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 되는 생활에서 일탈하니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 싶다. 그것이 바로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셈이다. 병풍 같은 주변의 먼 산까지 녹음이 짙고 휴게소의 화려한 꽃들이 계절을 말해 준다.정선의 시장이라고 별반 다
한 해가 가고 달력이 바뀐 지도 벌써 달포 째다. 빠른 지 늦은 지 그렇게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간다. 시간은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꾸준하게 어제와 오늘을 이어가고 그 속에서 또 하루를 보내고 있다. 부부(夫婦)로 연(緣)을 맺어 이곳을 들락거린 지도 어언 삼십 수년, 이젠 손주들까지 보았으니 적지 않은 시간과 기억들이 지나는 길과 멀리 산등성이에 켜켜이 쌓여있다.폐(廢)고속도로를 따라 처가(妻家)로 가는 길은 지름길이다. 길옆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운전에 신경을 쓰이게 한다. 경사가 심한 산 계곡을 굽이돌아 궁촌재를
겨울이 깊숙이 들어와 대설(大雪)이 내일인데도 들녘의 나무와 풀들은 푸른색을 건장하게 유지하고 있다. 계절이 무색할 정도다. 아직 춥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지만 그래도 계절 체면이 있지 이렇게 절기가 이름값을 못하는 게 못내 수상하다. 그래도 된서리를 맞은 나뭇가지의 잎들은 그나마 겨울임을 보여준다. 분명 단풍은 구시월에 지난 것 같은데 푸르름이 이정도니 의아하다.추부터널을 지나는 길목에서 올해 첫눈을 맞았다. 오전에 잿빛 하늘이던 우중충한 날씨가 첫눈을 내려준 것이다. 대설(大雪) 절기를 아는가? 싶어 반가웠는데 이내 시나브로 떨
늘 건강 때문에 우울한 친구를 불러내어 맑은 공기나 마시러 가자고 가볍게 길을 나섰다. 작은 산자락의 능선이라 쉽게 생각했는데, 오르막내리막이 반복되니 친구가 잘 걷지를 못한다. 쉬엄쉬엄 가자며 바위에 걸터앉아 가을을 만끽한다. 넘어진 겸에 쉬어간다고 사진기를 꺼내 주변 나무와 풀들을 담아본다.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푸른빛은 누렇게 물기가 빠져 시들어간다. 친구와 허허거리며 급할 것 없는 시간을 즐긴다. 가을빛이 꼭 우리 모습이라며 윤기 없는 얼굴과 까칠한 피부색을 마른 풀에 견주어 본다. 길옆에 산초나무가 키재기를 하자는 듯
일과를 마치고 저녁 늦게 볼 일이 있어 고향 길을 재촉한다. 자동차 불빛에 달맞이꽃이 반사되어 눈에 들어온다. 학창시절 어두운 밤길에 동무가 되어주던 꽃. 그 꽃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멀기만 했다. 아랫마을을 지나 논두렁을 걷는 길은 풀로 덮인 좁은 길이었다. 늦은 밤 혼자서 가는 길은 무서웠다. 달이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날은 덩그러니 서 있는 둥구나무만이 거리를 가늠해 줄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좁은 길을 안내하던 달맞이꽃. 달빛이라도 있는 날은 노란꽃이 반사되어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이곳 소리마을. 당시에 가왕(歌王)이라 불렸던 송흥록(宋興祿)과 명창 박초월(朴初月) 선생의 생가터가 있는 곳. 피를 토하는 듯 구성진 판소리로 민중들을 울렸던 명창의 소리는 녹음기로만 전해줄 뿐이다. 명창의 생가터 뜰에 서 있는 동상(銅像)만이 그분들을 추억하고 있다. 생가터의 텃밭 울타리를 따라 자줏빛 물감이 든 댑싸리가 줄을 지어 서 있다. 참 오랜만에 보는 풀이다. 이미 단풍이 들어 색이 변한 것이다. 누가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봄이 되면 담장이나 밭가에 저절로 싹이 나고 거름을
유등천을 거스르니 넓은 수면 위로 비친 쪽빛 하늘이 그림처럼 곱다. 잘 관리된 녹색 잔디가 눈을 편하게 해 준다. 냇물을 따라 도열한 고층 아파트와 건너편의 빌딩모습에 내가 도심 속의 사람임을 새삼 느낀다. 이마에 스치는 뽀송뽀송한 바람이 가을이 왔음을 일러준다. 어디에서 이같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심호흡을 하며 가슴 속 깊이 밀어 넣는다. 물가에는 왜가리가 긴 목을 내밀고 먹이를 조준하고 있다. 곳곳에 만들어진 화단에 아기자기한 꽃들이 하늘거린다. 망종화가 노란꽃을 흔들거리고 바로 아래 붉은 토끼풀꽃이 조화를 이룬다.
보청천 물줄기가 굽이굽이 한가하게 흐른다. 지금이야 편하게 자동차로 산을 넘지만 걸어서 다니던 시절은 만만치 않은 고갯길이었다. 구불구불 몇 굽이를 돌아 눈높이가 평평해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먼발치에 백화산이 우뚝 서서 바람막이를 하고 섰고 그 앞으로 넓은 뜰이 펼쳐진다. 야트막한 산 아래로 납작 엎드린 시골집과 그 앞에 펼쳐진 논과 밭들이 아지랑이 사이로 뿌옇게 다가온다. 언젠가 내 보금자리였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은 모습들이 푸근하고 정겹다. 이 고개를 넘어 처가(妻家)를 오간 지도 서른 해가 넘었다. 빈 집 같은 널찍한
어제 내리던 빗줄기가 그치고 반짝 보이는 햇빛은 눈이 부실 정도다. 숲길을 걸으며 나무 사이로 만나는 빛이 따갑다. 대웅전 뜨락에서 내려뵈는 풍경은 이곳이 신선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흰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쪽빛은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다. 오랜만에 찾은 수덕사에서 아내와 망중한을 즐긴다. 경내를 살짝 비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없고 숲길이라 산책하기 십상이다. 노송(老松)과 잡목이 우거진 옆길을 따라 걷는 이 시간이 나를 행복감에 젖게 한다. ‘삼 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물은 하루 아침의 이
강의 장소가 시내의 한복판에 있어서 오랜만에 구(舊)도심도 걸어보고 싶고 지하철도 타볼 겸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서니 상큼한 공기가 답답한 가슴을 씻어 내린다. 복잡한 출근시간을 벗어나선지 차량 흐름도 원만하고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 도심의 한복판에서 직장생활을 해서 낯익은 거리다. 신시가지가 생겨 도시의 중심기능이 옮겨갔지만 직장생활의 추억이 고샅마다 오롯이 묻어있는 거리다. 건물마다 화단을 만들어 푸른 나무들이 싱그럽다. 조그만 가게 앞에도 갖가지 화초와 채소를 심어 조그만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죽림정사에서 용화사로 다니는 산행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숲길이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든 걸어서 가든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잠깐만의 아스팔트길을 지나면 흙길 옆으로 모과나무, 상수리나무, 오리나무, 때죽나무 등 각종 크고 작은 나무들이 도열하여 그늘을 만들어 준다. 특히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쉴 수 있어 참 좋은 쉼터이기도 하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아내와 종종 버스를 타고 와서 산책 겸하여 이곳을 찾는다. 이미 여름에 들어선 풀과 나무들은 검푸른 이파리가 싱싱해 보인다. 철조망 울타리에 붉은 인동덩굴이 길게 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