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 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 안의 탐욕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타인에 대한 질투, 욕구를 넘어선 욕망, 욕망을 넘어서면 그것은 탐욕이 된다. 탐욕은 파멸에 이르게 한다. 시기심, 질투, 충족함을 넘어선 넘치는 욕심 등은 버려야 하지만, 태초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죄의식은 탐욕이다. 그래서 버릴 수 없기에 매 순간 자신에게 올라오는 부정의 감정을 잘 읽어야 한다. 혹시 혼자 있을 때나 다른 사람 관계 안에서 부정의 감정이 올라온다면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는 신호임으로 반가운 손님으로 맞이해야 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창조’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기존에 없던 아이디어, 물건, 현상 등을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예술, 과학, 기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가치나 형태, 개념을 만들어내는 창의적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또한 창조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거나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창조’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떻게 창조되어가는가? ‘나’는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대부분 부모로부터 길러진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일상에 놓여 있다. “조금 더 이불 속에 있을까?”, “뭐 먹을까?”, “어디를 갈까?”, “어떤 영화를 볼까?”, “만날까 말까” 등 사람에 따라 삶이 주는 무게는 다르지만, 결정과 선택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특히 우유부단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더더욱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고통을 더 많이 경험한다. 우유부단함은 자신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부분과 다른 사람에게는 답답함과 또 다른 차원에서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게 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자존감은 말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아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이다.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기초작업이 필요하다. 기초작업에 해당되는 것을 네 가지로 설명해 보려 한다. 첫째, 칭찬의 초점을 엄마의 눈높이가 아닌 아이에게 맞춰라. 말하기도 습관이다. 어려서부터 미안할 때 “미안합니다.” 고마울 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면 커서는 그런 말이 잘 안 나오게 된다. 실수라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 하루가 쌓여서 삶이 된다. 여러 날을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여러 날을 살아보았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날을 맞이해본 적은 없다. 주어진 하루가 매일 새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이다. 자연은 매일 다른 하루를 나름의 방법으로 잘 맞이하고 있다. 매일 보는 하늘도 똑같은 하늘이 없고, 구름의 모양도 늘 다르다. 나무와 꽃, 돌 사이에 작은 풀포기 하나라도 햇빛과 물과 공기를 먹은 만큼 자라고 있다. 단지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사실 우리의 삶도 변화무쌍한 자연과
내 삶을 살아내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에 대한 원망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따뜻한 배려일 수도 있다. 원동력은 저마다의 수많은 경험이 다르기에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감사합니다’란 말 한마디 덕분에 평생을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미안하다’란 말 한마디 듣기 위해서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깟 미안하다는 말이 뭐라고’, ‘그깟 감사하다는 말이 뭐라고’ 인생은 고(苦)라고 했는데, 그런 인생을 버티고 견뎌낼 만큼 그 한마디가 영혼의
우리는 부부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지인 관계에서, 또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관계에서 긍정적·부정적 감정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러한 감정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자신이 영향을 주기도 한다. 상대방의 불편한 감정을 자신에게 버릴 때 처음에는 얼떨결에 그대로 감정을 받으면서 당황스럽고 황당하기도 하면서 불쾌한 감정까지도 드는 경우가 있다. 긍정적인 감정은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다.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타인이든, 본인이든 ‘감정의 쓰레
우리가 외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의 한 부분이다. 만약 혼자일 때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해보려면 자기 내면의 에너지(관심의 방향)가 자신에게 쏠려 있는지 타인에게 쏠려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만약 타인에게 쏠려 있다면 자신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맺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 안의 고독감(孤獨感)과 상호 간의 분리(건강한 상실)를 통해 관계경험을 배운다. 그 배움은 내면의 힘을 긍정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독감’, ‘상실’을 경험하는 것은 자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착한 사람은 아니구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착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서 ‘그것’이 자신을 살게 하는 일이라면 착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이다. 착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고자 했다면, 혹은 현재 착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믿고 있는 자신 안에서 이제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나름의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관계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정서를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섭섭함과 서운함을 갖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쁘고 즐거운 정서가 90%이고, 서운한 마음이 10%인데도 불구하고 10%의 서운한 마음을 크게 생각하면 그 관계는 언제 친한 관계였나 싶을 정도로 깨지기도 한다. 이유를 모르고 깨져버린 입장에서
지구상에 인간만큼 취약한 존재는 없다. 동물이 새끼를 낳으면 새끼는 몇 분 만에 혼자 걷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포유류 동물은 스스로 엄마 젖을 찾아가서 젖을 먹는다. 인간만이 젖을 아기 입에 갖다 줘야 빤다. 구강에 힘이 약한 아이는 그것마저도 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독립적으로 혼자서기가 가장 취약한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의존적이며 부모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는가?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며 그런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부모로부터 정서적·신체적·육
심리적 어린아이가 어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있다면 그 자녀와 배우자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예전의 어르신들은 그것을 ‘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자녀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녀가 부모를 선택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본론으로 와서 그것이 사랑이든, 물질이든, 계약이든 간에 어떠한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했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책임이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으면 서로가 배려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