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창조’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기존에 없던 아이디어, 물건, 현상 등을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예술, 과학, 기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가치나 형태, 개념을 만들어내는 창의적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또한 창조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거나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창조’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삶은 어떻게 창조되어가는가? ‘나’는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대부분 부모로부터 길러진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일상에 놓여 있다. “조금 더 이불 속에 있을까?”, “뭐 먹을까?”, “어디를 갈까?”, “어떤 영화를 볼까?”, “만날까 말까” 등 사람에 따라 삶이 주는 무게는 다르지만, 결정과 선택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특히 우유부단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더더욱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고통을 더 많이 경험한다. 우유부단함은 자신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부분과 다른 사람에게는 답답함과 또 다른 차원에서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게 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자존감은 말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아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이다.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기초작업이 필요하다. 기초작업에 해당되는 것을 네 가지로 설명해 보려 한다. 첫째, 칭찬의 초점을 엄마의 눈높이가 아닌 아이에게 맞춰라. 말하기도 습관이다. 어려서부터 미안할 때 “미안합니다.” 고마울 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면 커서는 그런 말이 잘 안 나오게 된다. 실수라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 하루가 쌓여서 삶이 된다. 여러 날을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여러 날을 살아보았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날을 맞이해본 적은 없다. 주어진 하루가 매일 새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이다. 자연은 매일 다른 하루를 나름의 방법으로 잘 맞이하고 있다. 매일 보는 하늘도 똑같은 하늘이 없고, 구름의 모양도 늘 다르다. 나무와 꽃, 돌 사이에 작은 풀포기 하나라도 햇빛과 물과 공기를 먹은 만큼 자라고 있다. 단지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사실 우리의 삶도 변화무쌍한 자연과
내 삶을 살아내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에 대한 원망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따뜻한 배려일 수도 있다. 원동력은 저마다의 수많은 경험이 다르기에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감사합니다’란 말 한마디 덕분에 평생을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미안하다’란 말 한마디 듣기 위해서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깟 미안하다는 말이 뭐라고’, ‘그깟 감사하다는 말이 뭐라고’ 인생은 고(苦)라고 했는데, 그런 인생을 버티고 견뎌낼 만큼 그 한마디가 영혼의
우리는 부부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지인 관계에서, 또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관계에서 긍정적·부정적 감정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러한 감정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자신이 영향을 주기도 한다. 상대방의 불편한 감정을 자신에게 버릴 때 처음에는 얼떨결에 그대로 감정을 받으면서 당황스럽고 황당하기도 하면서 불쾌한 감정까지도 드는 경우가 있다. 긍정적인 감정은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다.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타인이든, 본인이든 ‘감정의 쓰레
우리가 외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의 한 부분이다. 만약 혼자일 때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해보려면 자기 내면의 에너지(관심의 방향)가 자신에게 쏠려 있는지 타인에게 쏠려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만약 타인에게 쏠려 있다면 자신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맺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 안의 고독감(孤獨感)과 상호 간의 분리(건강한 상실)를 통해 관계경험을 배운다. 그 배움은 내면의 힘을 긍정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독감’, ‘상실’을 경험하는 것은 자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착한 사람은 아니구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착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서 ‘그것’이 자신을 살게 하는 일이라면 착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이다. 착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고자 했다면, 혹은 현재 착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믿고 있는 자신 안에서 이제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나름의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관계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정서를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섭섭함과 서운함을 갖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쁘고 즐거운 정서가 90%이고, 서운한 마음이 10%인데도 불구하고 10%의 서운한 마음을 크게 생각하면 그 관계는 언제 친한 관계였나 싶을 정도로 깨지기도 한다. 이유를 모르고 깨져버린 입장에서
지구상에 인간만큼 취약한 존재는 없다. 동물이 새끼를 낳으면 새끼는 몇 분 만에 혼자 걷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포유류 동물은 스스로 엄마 젖을 찾아가서 젖을 먹는다. 인간만이 젖을 아기 입에 갖다 줘야 빤다. 구강에 힘이 약한 아이는 그것마저도 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독립적으로 혼자서기가 가장 취약한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의존적이며 부모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는가?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며 그런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부모로부터 정서적·신체적·육
심리적 어린아이가 어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있다면 그 자녀와 배우자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예전의 어르신들은 그것을 ‘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자녀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녀가 부모를 선택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본론으로 와서 그것이 사랑이든, 물질이든, 계약이든 간에 어떠한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했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책임이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으면 서로가 배려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
책을 읽다가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명언을 접하면서 명치를 찔린 듯했다. 그의 명언을 인용해 보면, ‘자기 나이에 맞는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나이에 맞는 온갖 불행을 겪는다.’이다. 내가 이 말에 꽃힌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요즘 내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오래 살 것 같아요. 욕을 많이 먹어서요.” 상담현장에서도 돌팔매를 맞는 경우가 있다. 돌팔매를 맞는 경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상담료를 지불하는 보호자 입장에서는 상담이 길어지는 것이 불편해서 상담자에게 세뇌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의 40대는 움직임이 많았다. 모임도 많았고 만나는 사람도 다양했고, 외부적인 활동도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할 정도로 외부적인 일에 몰두했었다. 사람들이 마냥 좋았다.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웃고 즐거워했고 행복했다. 그런 외부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 가정에 많이 소홀했다. 나의 빈자리를 남편이 많이 채워주었다. 남편에겐 늘 고맙고, 자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이런 움직임(활동)은 40대 중반에 종점을 찍었다. 박사 공부를 시작했었고, 사람 관계에서 쓰라린 경험을 했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 증상으로 여러 번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온전히 진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관계 안에서는 그 사실을 묵인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묵인하는지도 모르면서 ‘진실하다’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즉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것과 돈을 빌릴 때 행동과 갚을 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히려 돈을 받아내는데 애간장을 태우고 결국 못 받는 경우를 자신이 경험을 했거나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도 그 사람이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 수 있다라고 말한다. ‘오죽했으면 사람이 사기치냐? 돈이 사
이 세상에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즉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맺고 있으며, 그 관계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관계 속에서 오해나 속상함 등의 불편한 경험을 줄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공적인 관계를 사적인 관계에 집중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스스로가 만든 굴레 속에서 갇혀 버린 격이 된다. 혼자 자책하게 되고, 상대방을 자기 식대로 오해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으로부터 고통받게 된다. 이런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나 또한
[박길수 기자]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인맥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그 인맥에도 순위가 있다. 절친인 경우의 인맥은 다르다. 몇 다리 걸친 인맥은 인맥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인맥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입이 방정’이란 말을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주변 어르신들이 쓰는 단어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런 단어를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최근 들어,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입단속’이란 것을 창피스러운 일을 경험하면서 알
일 년을 주기로 볼 때, 어느 시기가 되면 좌절 아닌 좌절감을 경험할 때가 있다. 마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렵고, 불안하고,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고, 지금까지의 삶이 무가치감을 느낄 때 스스로 느껴지는 좌절감을 한 번쯤은 잠깐이라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한다. 특히 좌절감을 통해 깨달음은 또 다른 신선함(상쾌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최근 나는 나의 대화 패턴을 발견했다. 나는 내성적인 성향이 짙은 사람이다. 그런 반면, 편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장난끼가 넘치는 발랄한 행동을 함께 지닌 사람이다. 특히 어느 장소에
나는 한 때 신뢰를 엄청 중시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 또한 자의든, 타의든 신뢰를 깨버린 적이 있었을 것을 생각해 보면, 살면서 신뢰를 내가 생각할 만큼 엄청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에 빠져본 적도 있었다. 이럴 때 나는 나에게 말한다.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이 너무 빠지지 마세요.라고!변하지 않는 사실은 신뢰가 한번 깨지면 절대로 처음과 같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한두 번은 처음처럼 신뢰할 수는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관계 안에서 서로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신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깨진 그릇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좋음과 싫음’, ‘음과 양’ 등으로 사고합니다. 엉뚱한 발상이지만, 우리 성(sex)도 남성과 여성, 그래서 태초부터 이진법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순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수해 왔던 사고에 전환이 필요해서 다양한 교육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익숙하고 입에 밴 습관은 여전히 ‘좋고 나쁨’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쁜 친구, 좋은 친구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거울이 되어주는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결국 인간은 인간을 통해서 보고, 인간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삶은 희로애락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친구들의 이름은 “무기력, 게으름, 불평, 비교” 입니다. 여기에 곁들어지는 친구가 “미숙함” 입니다. 그 친구들은 처음부터 드러내면서 접근해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열정’(가칭)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가짜열정’이었다면 본래의 이름이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