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 <47>

1. 프라하 지도.
체코 수도 프라하(Prague)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블타바 강(Vltava river)  건너 고지대에 프라하 성이 있고, 반대편 저지대에는 구시가지가 있다. 기원전부터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였던 프라하는 10세기부터 1100년 이상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탓에 로마네스크(10c~12c)․ 고딕(12c ~15c)․ 르네상스(14c~16c)․ 바로크(17~18c)․ 로코코(18c)․ 아르누보(19C~20c초) 등 다양한 유럽 건축양식의 건물이 많은 프라하를 ‘건축양식의 백화점’이라고 하는데, 또 지리적으로 유럽 동서남북 교통의 중심지여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수도 프라하는 100개의 뾰족한 첨탑이 있다고 하여 ‘100탑의 도시’라고도 말한다.
1-1. 바츨라프 2세 기마상.

체코국립박물관 앞 바츨라프 2세(Vaclav II : 1271~1305)의 기마동상이 있는 곳에서 구시청광장을 지나 화약창고가 있는 카를 교 입구까지 약750m, 폭 60m의 거리를 구시가지라고 하는데, 거리 양쪽에는 1천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유명한 호텔과 백화점, 레스토랑들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시대별 건물이 즐비해서 유럽 건축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건물들은 지금도 은행과 카페, 환전소, 서점, 패스트푸드점 등으로 이용되고 있고, 광장 주변에는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틴 성당, 골드 킨스키 궁전, 돌종의 집 등이 있다. 또, 과학자 케플러, 아인슈타인, 모차르트와 드보르자크, 소설가 카프카 등 훌륭한 수많은 예술인과 사상가들이 활동했던 흔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구시가지는 1992년 도시 전체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라하에서도 심장이나 다를 바 없다. 
2. 구시청 광장.

바츨라프 2세의 기마동상이 있는 일대를 바츨라프 광장(Vaclavsky namesti)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처럼 넓은 공터가 아니라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광장 바닥을 뒤덮은 대리석 석주(石柱)들과 산책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사색할 수 있는 벤치와 쉼터 등이 풍요로웠을 중세도시의 영화를 잘 말해준다.
2-1. 후스 동상.

아버지 프셰미슬 오타카르 2세가 죽자 1278년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바츨라프 2세는 12세 되던 1283년까지 보헤미아를 섭정하던 사촌 오토 4세(Otto Ⅳ)의 궁정에서 살았는데, 그가 프라하로 돌아왔을 때 보헤미아는 어머니의 정부인 팔켄슈타인의 자비슈가 통치하고 있었다. 1289년 18세의 바츨라프 2세는 자비슈 등 반대파를 처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그 후 오버슐레지엔 지방 대부분을 합병하고 1291년 폴란드의 크라쿠프를 점령하여 1300년 폴란드 왕이 되는 등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임금으로 추앙받고 있다. 
3. 틴 성당.

구시가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광장 한 가운데에 종교개혁의 선구자 보얀 후스(Jan Hul; 1372~1415)와 그 지지자들의 동상이 있는 구시청광장이다. 이곳은 구시청사 시계탑에 중세의 천문시계가 있다고 해서 천문광장이라고도 한다.
3-1. 틴 성당(야간).

후스는 보헤미아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서 카를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종교 개혁자로서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1411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파문되고 1415년 콘스탄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재판받고 화형 당했는데, 이것은 1521년 독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 보다 100여 년 전의 일이다. 후스의 동상은 순교 500주년을 맞아 1915년 7월 후스와 그 지지자들이 처형된 곳에 세워서 체코에서 가톨릭과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가 얼마나 중요시 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상 앞의 계단은 구시가지를 둘러보다가 지친 여행객들이 잠시 앉는 휴식 터가 되어주며, 후스 동상에는 나치가 새긴 卍 표식이 남아있다. 
4. 성 니콜라스 성당.

구시가지에서 대표적인 건물은 1365년에 세운 틴 성당(Church of Our Lady before Tyn)으로서 구시청사 맞은편 킨스키 궁전 바로 옆에 있는 틴 성당은 프라하 성의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고딕 양식의 우뚝 솟은 두 개의 첨탑은 프라하 시내 어느 곳에서든지 잘 보이며, 황금으로 장식된 80m 높이의 두 개의 첨탑은 ‘쌍둥이 탑’이라고도 한다. 성당에는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 상과 예수 그리스도 상이 있다. 
4. 천문시계.

그러나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틴 성당 왼편의 구시청사의 시계탑에 있는 천문시계 오를로이(Orloj)이다. 천동설(天動說)이 지배하던 1410년 프라하대학의 수학교수 하누슈가 만든 천문시계는 중세의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증거로서 600년이 지난 지금도 매시 정각에 12제자들이 나오는 것을 구경하려고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천문시계는 시계와 달력을 겸하는데, 시계가 그려진 두 개의 원반 옆에는 네 귀퉁이에 네 개의 조각이 달려 있는 곳에서 매 시간마다 원반 위 두 개의 창문이 열리며 12제자를 상징하는 인형들이 차례로 나왔다가 사라지고, 맨 마지막에는 시계 위쪽의 닭이 울면서 시간을 알려 준다. 또, 그 시계자판 아래에는 당시 문맹자들에게 알기 쉽게 농사시즌을 알리는 그림형식의 시계판도 있다. 이렇게 기발하고도 아름다운 시계에 대한 소문이 유럽 각국으로 퍼지면서 주문이 쇄도하자, 체코왕국에서는 천문시계를 독점하려는 욕심에서 하누슈 교수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하누슈 교수는 자신이 만든 시계를 만져보겠다며 시계탑에 올라가서 시계에 손을 대자 시계 바늘이 그대로 멈추어 400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1860년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1. 시계탑에서 본 바츨라프 광장.

구시청광장에서는 후스의 화형에 이어서 1422년 성직자 첼리브스키(Zelivsky)가 처형되고, 30년 전쟁 때인 1621년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던 27명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발트슈테인 장군에 참수를 당하는 등 체코의 수많은 사건의 역사적 현장이다. 근대에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2차 대전이 종료되자 1948년 광장 주변의 킨스키 궁의 발코니에서 공산당정권을 선언하여 공산국가가 되기도 했다. 
5. 구시가지 노천카페.

1968년 봄 폭풍처럼 일어난 체코의 거센 민주화 바람을 세계 언론은 ‘프라하의 봄’이라고 말했지만,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한 구소련군에 의해서 프라하의 봄은 무참히 짓밟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9년 100만 명이 운집한 바츨라프 광장에서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민주화운동을 역설하여 무혈혁명을 지휘하여 체코의 민주주의를 쟁취했는데, 하벨은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하벨의 무혈 민주화운동은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이라고도 말하는데, 광장에는 분신한 청년의 사진과 함께 그 앞에는 꺼지지 않는 향불이 타오르고 있다.   

틴 성당 바로 옆에는 19세기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 1924) 생가도 있다. 부유한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프카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와 현대인의 고립과 불안을 묘사하여 프랑스 사르트르(Jean Paul Sartr: 1905~1980)와 독일 카뮈(Albert Camus: 1913~1960)에 앞선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서 41세 때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그는 2개월간의 요양과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 평생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프라하는 카뮈의 고향이자 독자적인 문학세계의 원천이 되었는데, 생가는 카프카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카프카는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하라고 하였지만, 친구들이 출판해서 세상에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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