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에서 겨울을 보낸 시황제 일행은 강을 건너 회계로 가다 옛날 오나라 땅을 거쳐 바다를 건너 북쪽 낭야에 도착했다.

낭야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당당했다. 자신이 이룩한 천하통일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는 곳이었다. 육지의 끝에 있는 도시였으므로 그곳에 다다르면 과연 천하가 통일된 것이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황제는 유난히 낭야를 좋아했다. 그곳 낭야대에 올라 멀리 황해를 넘어다보는 기분은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가슴으로 한껏 안아보면 정말 세상이 가슴속으로 저며 드는 착각마저 들었다.

시황제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매일같이 낭야대에 올랐다.

“새벽공기가 차옵나이다. 오늘은 피하시고 다음날 낭야에 오르심이 좋을 듯 하옵나이다.”

신하들이 이른 새벽에 낭야에 오르는 것을 만류했다. 하지만 시황제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 낭야대에 올랐다.

아직 봄이라고는 하지만 겨울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탓에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뼈 속을 파고들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춥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시황제는 높다란 대위에 혼자서서 멀리 바다를 넘어다보며 멍하게 서있자니 모든 상념이 사라져버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해풍에 날아가는 운무처럼 일순간에 걷혀버렸다. 마음이 편했다.

도리어 먼 조상들이 피땀으로 일구었던 진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상념처럼 잔잔하게 스쳐갔다.

진나라는 국조나 다름이 없는 진양공이 기원전 770년 주나라 왕실로부터 제후로 봉해지고 기산 서쪽 땅을 하사받으면서 비롯됐다. 물론 당시에는 독립된 나라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으로 명패를 내민 정도였다.

그로부터 문공, 목공, 영공, 혜공, 헌공으로 이어진 왕조는 시황제의 6대조가 되는 효공에 이르러 국가로서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고 진정한 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효공은 기원전 361년 왕위에 오른 뒤 여러 빈객과 신하 중에 진나라를 강성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가진 자가 있으면 높은 벼슬을 내리고 봉지를 하사하겠다는 령을 공포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다.

이때 효공이 등용안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이가 상앙(尙鞅)이었다.

그는 본래 위(衛)나라 군주의 후손으로 위앙 혹은 공손앙이라 불렸으나 진나라에 들어가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상 지역에 있는 15개 읍을 하사받아 상군 혹은 상앙이라고 불리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당초 위(魏)나라로 건너가 자신의 법가정신을 펼칠 생각이었으나 위혜왕(魏惠王)이 그를 발탁하지 않자 진나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중국은 예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부귀빈천과 혈연관계의 친소가 구분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신분에 따라 권력과 지켜야할 도리가 달랐다. 하지만 상앙은 법치를 근간으로 함으로써 모든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개혁을 단행했다.

초기에는 백성들이 법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 상앙의 이 같은 법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효공을 앞세워 법을 공포하려 했지만 이를 따를 이들이 없을 지경이었다.

상앙은 궁리 끝에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성문에 방을 내걸고 이를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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