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 속으로] <24>

하이델베르크 지도.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약70㎞ 떨어진 중세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시민 15만 명이 살고 있는 아담한 중세도시로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버스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기차도 빈번하게 다니는 도시다. 하이델베르크란 도시명은 독일어로 ‘신성한 산’이라는 ‘하일리겐베르그(Heiligenberg)’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지명의 유래가 된 하일리겐베르그는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인 고성(古城)이 있는 네카 강 언덕이다. 네카 강이 흐르는 하이델베르크 근교 마우어에는 1907년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BC 55만 년 전의 직립인간 “하이델베르크인”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 유물은 하이델베르크대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정승열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장
하이델베르크는 교황 우르반 6세의 승인을 받아 폴란드의 프라하 대학과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에 이어 1386년 세 번째로 설립된 대학이자 독일 최초의 대학인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있으며, 독일에서도 아름다운 중세의 고성으로 유명한데, 오늘날 15만 명의 시민 중 대학생이 3만여 명이나 되는 대학의 도시이자 독일에서도 아름다운 고성으로 유명하여 하이델베르크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관광도시가 되었다. 특히 하이델베르크는 종교개혁의 첫 기치를 내건 도시라는 점 이외에도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침략하던 1815년경 러시아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프로이센 왕이 모여서 이른바 신성동맹을 체결한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중세도시 하이델베르크는 30년 동안 계속된 종교전쟁(1632)으로 성령교회· 마르슈탈(옛날의 왕실 마구간)·기사회관(시민의 집)등만 살아남았을 뿐, 도시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어서 현재의 건물들은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들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의 고성도 이때 파괴되었다.

광장 헤라클레스
광장문화인 유럽의 중세도시답게 하이델베르크의 구시청사 앞에도 직사형의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이 있으며, 광장 한 가운데에는 헤라클레스 동상과 분수대가 있다. 유럽인들은 헤라클레스를 매우 좋아해서 그리스 아테네는 물론 로마, 피렌체 등 유럽의 나라를 불문하고 주요도시마다 헤라클레스 상을 세웠다. 광장에서는 중세에 이교자들과 마녀(?)들을 공개 재판후 화형 시켰다고 하는데,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인들이 이교도들을 증오하며 잔인하게 처형했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광장 한쪽에는 1685년 가톨릭을 신봉하는 군주가 선제후가 되어 개신교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세운 성모마리아 상이 있는 등 하이델베르크는 종교개혁의 출발지이자 다시금 가톨릭으로 복귀한 도시이다.

성모마리아상.
광장 서쪽의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는 1398년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에 의해서 12년 만에 완성된 영내 최대의 교회이자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서 가톨릭을 예배하다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로 변했으나, 현재는 다시 가톨릭교회가 되었다. 특히 30년 전쟁 때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바로크 양식의 돔이 특징인 성령교회의 지하에는 하이델베르크를 다스리던 역대 선제후들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신성한 교회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냈던 예수와 달리 교회의 광장 쪽 벽에 덧대어 만든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광장의 동쪽에 있는 시청사는 30년 전쟁 때 무너진 것을 1789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복구했으며, 시청사 1층은 관광안내소가 있다.

성령교회와 광장.
한편, 성령교회의 남쪽에 있는 거대한 르네상스식 건물을 “시민의 집”이라고도 하는데, 시민의 집은 1592년 30년 종교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포목상을 하던 칼빈주의자 샤를 베를리에가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서 개신교의 발상지인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시민의 집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서 시청사가 파괴되자 잠시 시청사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마르크트 광장에서부터 비스마르크 광장(Bismark platz)까지 하이델베르크의 구시가지 중심지를 하우프트 거리(Hauftstraße)라고 하는데, 도로 양쪽으로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 슈퍼마켓 등이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여행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고성(古城)이 한눈에 보이기도 한다. 또, 광장에서 네카강 위에 놓인 ‘칼 데오도르 황제 다리(Karl Theodor Brdg.)’까지 이어지는 골목을 슈타인 골목(Steingasse)이라고 하는데, 슈타인 골목에는 기념품가게들이 즐비하고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시청사.
외부에서 하이델베르크로 들어오는 출입문과 같은 역할을 했던 네카강 위의 칼 테오도르 황제 다리는 원래 나무로 설치한 다리가 있었으나, 홍수로 자주 떠내려가자 칼 테오도르 황제가 1786년부터 2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지금의 다리를 세우자 황제의 이름이 붙여졌다. 다리 입구 양쪽에 두 개의 첨탑이 파수대처럼 높이 솟아있고, 입구 왼쪽에는 마치 중세 기사들의 투구와 비슷한 청동 원숭이 상이, 오른쪽에는 다리를 설치한 칼 테오도르 황제의 입상이 있다.

기사의 집(호텔).
특히 머릿속이 텅 빈 원숭이가 거울을 손에 들고 있는 청동상은 적군과 싸울 때 원숭이에게 거울을 들려주면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이도록 했다고도 하고, 또 다리를 건널 때면 원숭이가 엉덩이를 물며 환영인사를 한다는 전설도 있다. 원숭이 가면을 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도 있지만, 열대지방에 사는 원숭이가 하이델베르크에 많았다는 것인지는 약간 머리가 갸우뚱해진다.

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너서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칸트, 헤겔, 괴테와 하이덱거 등 하이델베르크가 낳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즐겨 다니던 산책로여서 ‘철학자의 길(Philospweg)’이라고 한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철학자 못지않게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의미에서 ‘철학자의 길’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산길에서 바라다 보이는 네카강과 고성을 비롯한 하이델베르크 시내 전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광장에서 본 고성.
카를 테오도르 다리와 황제
청동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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