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의 대표 기업인 계룡건설의 창업주 이인구 명예회장이 15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해 경제계에서는 지역사회의 큰 별이 졌다며 애도하고 있다.

‘일하는 보람으로 산다’

유림 이인구 명예회장의 회고록 제목이기도 한 이 구절은 그의 인생관을 잘 축약한 대목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촌음을 아끼며 달리면서 생각하고 뛰면서 일해 왔습니다. 숱한 과오도 있었고, 숱한 영광도 있었습니다. 오늘 이후도 비록 일하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건강이 허락하는 시간까지 일벌레가 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유림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큰 족적을 남긴 지역사회의 거목이었다. 창조적 도전의식, 불굴의 개척정신, 강인한 추진력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1970년 계룡건설을 만들어 현재 전국 시공능력 평가 17위 건설회사로 성장시켰다.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의정 활동도 했다.

회고록은 이 명예회장의 유소년시절부터 장교시절, 계룡건설 창업, 정치입문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는 물론 경영관, 인생관이 투영된 다양한 일화를 실감나게 소개하고 있다. 

이 명예회장은 충남 대덕군 동명 효평리(현 대전시 동구 효평동)에서 태어났다. 대전중학교 5학년 1학기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사병에서 장교를 거쳐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전역하기까지 군에서 20여년을 복무했다.

이때 이인구 명예회장은 교관후보생에 1차로 선발되어 미국 워싱턴 근교에 있는 미 육군공병학교에 파견됐다. 거기서 이명예회장은 각종 토목공사를 수행하는 중장비교육, 토질공학, 각종 건설공사 등 건설 전반에 관한 실무교육을 받았다.

교육수료 후 이 명예회장은 한 트럭도 넘는 교범(敎範)들과 영화필름을 싣고 돌아와 김해 육군공병학교와 진해 육군대학을 오가면서 건설 관련 전공교육을 맡는다.

그런 만큼 이명예회장은 공병의 현대화를 이끈 제1세대의 선두주자로서 지금도 우리나라 건설사(建設史) 상 현대공법 도입의 원조적 역할을 해냈다고 자부하고 있다. 

건설개척의 길에 묻히다보니 이명예회장 스스로도 점차 그 체질에 융화되고 만다.


이인구 명예회장의 나이 30세이던 1961년 5·16혁명이 일어나 군사정부가 탄생했다. 그때 이 명예회장은 육군 소령이 되어 있었다.

그 시기에 이 명예회장은 중견 공병장교로서 국토건설계획 수립과 사업추진 대열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핵심부문이라 할 수 있는 국토건설부문의 사업계획 골격을 이 명예회장이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사시설의 현대화 계획도 이 명예회장의 작품 중 하나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군막사는 천막시설이 아니면 흙벽돌 막사가 고작이었다.

그런 기존개념을 허물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 할 만한 콘크리트 기초에다, 시멘트 블록벽, 목조 트러스에 시멘트 기와지붕 형식으로 된 표준막사를 설계하여 번듯하게 완성시켰다.

1967년경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기간 경부고속도로 계획의 의지를 천명한다.
이인구 중령은 육군대표의 차석으로 이 실무위원회의 계획반에 동참해 핵심멤버로서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명예회장에게 막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4000만 달러의 재원을 인가받아 중장비 구매 교섭반장으로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미 현지감각을 익힌 바 있는 이명예회장은 곧 미국 중기회사들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차관(외상) 판매하겠다는 교섭문서와 판매조건을 문서로 받아냈다.

아울러 이 막대한 중장비의 정비 등 애프터 서비스와 부속 공급계약도 체결했으며, AS반을 가동하여 한국 건설회사들에 대한 장비 운전교육도 실시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이 명예회장은 육군공병 출신 중 장비 운전경험을 가진 요원을 조사하여 취업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는 동시에, 현역장병 중 제대시켜 현장에 투입시킬 수 있는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여 인력 소요시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육사 출신 공병장교와 현장실무 경험이 많은 장교들로 고속도로 감독단을 편성하는 계획도 수립했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총연장 428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는 총예산 450억 원이 투입돼 1970년 7월에 준공됐다.

이 명예회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준비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이르던 1967년 12월 30일 공병 중령으로 제대한다.

이 명예회장은 제대 직후 잠시 도미, 300만 달러를 차용하는 데 성공했고, 이 돈을 가지고 귀국하여 동아중건설에 투자한다. 전무로서 회사 경영에 일부 참여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69년 유풍기업이라는 중장비대여 및 골재생산 회사를 세워 몇 개월간 운영을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1월 오늘의 계룡건설의 모태가 된 계룡건설합자회사를 인수, 재설립하여 이번에는 대전·충남지역의 건설사를 새롭게 써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1979년 갑년체전 때의 일화는 건설업계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이인구 명예회장은 ‘나의 인생과 사운을 걸고 이 공사를 해내겠다’는 각오로 이 공사를 떠맡기로 일대 결단을 내린다. 

전국 굴지의 대형 건설사들도 절대 공기가 부족하다며 혀를 내두르던 그 공사를 떠맡아 1일 3교대 24시간 작업으로 행사 시작 며칠 전 공사를 완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계룡건설의 커다란 획을 긋게 된 대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우선 운동장 주변에 고광촉 조명등을 설치하고 운동장 복판에 4층 높이의 통제탑을 세우고 여기에 망원경, 마이크, 전화, 공사계획서, 도면을 비치하여 진두지휘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모든 작업자에게는 위치별, 직종별로 색깔이 다른 안전모를 착용토록 하고 통제탑에는 ‘180일 작전 앞으로 000일’이라고 커다랗게 쓴 표지판을 붙여 남은 기일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어려운 작업에 대해서는 현상금을 내걸고 목표달성이 되면 공약한 현상금을 정확이 지급함으로써 이른바 당근을 제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명예회장의 당시 사무실에 걸어놓았던 좌우명은 ‘一路邁進(일로매진)’이라는 네 글자였다.


무엇보다 이명예회장은 남이 할 수 없다고 포기한 사업이나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주요한 사업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지역민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왔다. 13·15대 국회 의정활동을 통해 국정에도 참여했다.



또 1998년 국정감사때는 피감기관으로부터 정무위원회 베스트의원으로 뽑혔고, 여야의원들이 자체선정한 '98국감 20인'에도 들었다. 특히 1998년 6월 한국유권자운동연합에서 실시한 제15대 의정활동 평가에서 299명의 국회의원중 10명 안에 듦으로써 그 활약상을 보다 확실히 인정받았다.


이 회장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공헌 활동을 해 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2년에는 계룡장학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26년간 1만 4000여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또 광개토대왕비 복제비 건립사업, 삼학사비 중건사업, 일본 백제문화유적탐사 사업, 백야 김좌진장군 추모사업, 독도 우리 땅 밟기 운동, 유림경로효친대상 제정, 유림공원사생대회 등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과 전통문화 계승에 헌신하기도 했다.


사재를 출연해 '유림공원'을 조성해 대전광역시에 기부했을 뿐 아니라 태안유류사고 복구 활동, 대전시티즌 프로축구단 창단, 나라사랑 보금자리사업 후원, 희망나눔캠페인 후원, 메르스 대책 후원, 와병중 예비역 위문, 유림뜰 조성·기부 등 공익실현에 앞장서 왔다.,

이 명예회장은 회고록 5절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결단에서 “회사의 발전을 추구하되 발전의 근원이요, 원동력인 지역사회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경영철학으로 향토색이 강한 계룡건설을 대전·충남지역의 정상권에 올려 놓았고, 지역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업이라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발적으로 나서는 과단성을 발휘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건설외길을 걸어오면서 큰 족적을 남긴 지역사회의 거목 이인구 명예회장은 15일 지역사회에 커다란 교훈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 학력사항
 1945       대전동명초등학교 졸업 (27회)
 1946-1952  대전중고등학교 졸업 (31회)
 1952       미국 육군공병학교 고등육사반 과정 졸업
 1964       충남대학교 법경대학 법학과 졸업
 1986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최고 관리자과정 제2기)
 1994       충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2003       대전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2003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철학박사
 2004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국립극동대교통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2015       한밭대학교 명예공학박사

□ 경력사항
 1970-1995  계룡건설산업(주) 회장
 1975-1981  대전·충남 핸드볼협회 회장, 대전·충남 궁도협회 회장,
            대전·충남 탁구협회 회장, 대전·충남 수영연맹 회장
 1976-1982  재향군인회 충남지회 지회장
 1978-1981  대전·충남 사격연맹 회장
 1982-1988  대전상공회의소 회장(11·12代), 대전지역노사협의회 회장,
            충청남도 한·일 친선협회 회장
 1985-1993  충남대학교 총동창회 회장(18-21代)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신민주공화당 대덕, 연기)
 1988-1990  국회건설위원회 위원
 1988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위원, 신민주공화당 대전·충남지부 위원장,
            신민주공화당 당무위원, 대전생명보험(주) 설립추진위원장
 1990-1992  93대전엑스포 특별위원회 위원
 1991-1992  국회상공위원회 위원
 1991-1992  민주자유당 당무위원
 1991        대전생명보험(주) 명예회장(現 미래에셋 흡수합병)
 1992-2017  계룡장학재단 이사장
 1993-1996  대한민국 헌정회 대전지부 회장
 1995-2000  자유민주연합 대덕구 지구당 위원장
 1995-1997  자유민주연합 대전시지부 위원장
 1995-2000  자유민주연합 당무위원
 1996-2001  계룡건설산업(주) 명예회장
 1996-2000  제15代 국회의원 (한·일 의원연맹위원, 한·쿠웨이트의원 협회 회장,
            한·중 의원협회 회원, 한·인도네시아 의원협회 이사, 한국동란참
            전의원 친목회 부위원장, 국회정각회 회원)
 1996-1998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1996-2000  국토의 효율적 활용에 관한 연구모임 회장
 1996-1998  대전고등학교 총동창회장
 1996-2005  ㈜대전프로축구단 명예회장
 1996       96예산결산 위원회 위원
 1997       한보사건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1997       97예산결산 위원회 위원
 1998       98예산결산 위원회 위원
 1998-2000  국회정무위원회 위원
 1998-2000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2001-현재  계룡건설산업(주) 명예회장
 2002-현재  대전대학교 객원교수
 2002-현재  KR산업 명예회장
 2003       반부패 국회의원 포럼 고문
 2003       한국학중앙연구원 발전후원회장
 2007-2008  충청남도 유류사고대책위 자문위원
 2008      ‘충청남도지’편찬위원
 2008-2009  2009 안면도국제꽃박람회 범도민지원협의회 회장
 2009-2010  2010 세계대백제전 범도민지원협의회 회장
 2010       월남(月南) 이상재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2010-2011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고문위원
 2011       2011 금산세계인삼엑스포 범도민지원협의회 고문

□ 상훈사항
 1952       화랑 무공훈장
 1978       국민훈장 동백장
 1979       산업포장
 1980       대통령 표창(수해복구)
 1986       국무총리 표창(아시안게임)
 1992       한국건축대상(한국건축가협회)
 1998       새마을금고 대상
 1999       산업포장
 2000       안전경영대상
 2000       동탑산업훈장
 2000       석탑산업훈장
 2002       대통령표창
 2003       기업경영대상
 2005       제29회 월남장 수장
 2007       자랑스런 대전인상
 2009       대전시민대상
 2010       자랑스런 충청인상
 2010       산업포장
 2010       40년이상 향토기업 감사패 외 300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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