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문재인과 1만명의 권선택 시장 걸유(乞宥)

“수령(守令)이 형식적인 법규에 걸린 것을 뭇 백성들이 슬프게 여겨 서로 이끌고 왕에게 호소하여 그 죄를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옛날의 좋은 풍속이다.” 다산 정약용은 백성들이 대궐에 나아가 수령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비는 것을 ‘걸유(乞宥)’라고 하였다. 정말 그런 경우가 있을까 싶은데 예전에는 있었다. 목민심서에는 이런 사례를 15건이나 소개하고 있다.

한나라 때 위상(魏相)이란 사람이 하남태수로 있으면서 간사한 짓을 막으니 호강(豪强)들이 두려워하면서 복종하였으나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다. 이에 하남의 노약자 1만 명이 대궐 앞을 지키며 청원하니 마침내 하남태수가 사면받았다. 우리나라에선 강원도의 안협현감 이영휘가 부당한 죄목으로 파면되자 온고을 사람들이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가 떠날 때 전송하러 나온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미래권력과 대전시민 1만명 모아 벌인 현직시장 ‘걸유 행사’
 
권선택 시장이 한 달에 한번 시민들과 함께 하는 ‘아침동행’이 지난주엔 대규모 행사로 열렸다. 참가 인원이 평소 200~500명보다 훨씬 많은 1만 명이나 되었다. 유력한 대권후보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참석했다. 그는 “권선택 시장이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는데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누가 왜 행사를 이렇게 키우고 유력 대권주자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권 시장의 재판을 떠올리게 돼 있다. 권 시장은 작년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으나 대전고법 환송심에서 또다시 중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에서 다시 무죄로 뒤바뀌지 않는다면 시장직을 잃게 된다. 유무죄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권 시장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행사의 제목은 ‘새봄맞이 대청소 아침동행’이었지만 권 시장을 위한 걸유 행사였다. 문 대표는 곧 실시될 가능성이 큰 대통령 선거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앞으로 2~3개월 뒤엔 대권을 쥐고 있을 수도 있는 예비 권력이다. 걸유는 용서를 빈다는 뜻인데 이런 행사에 그런 사람까지 참여했으니 순수한 걸유는 아닌 셈이다.
 
과거엔 걸유를 받은 수령이 사면되어 복직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정약용은 “백성이 수령을 사랑하고 받드는 정이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호소하는 소리가 몹시 슬퍼 감동할 만하면 비록 수령의 죄가 깊고 무겁더라도 용서해줌으로써 백성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권 시장도 억울한 면이 있다. 웬만한 정치인들은 포럼을 운영하지만 이것 때문에 당선이 무효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권 시장은 거기에 걸려들었다.
 
오늘날의 걸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 이벤트다. 걸유라기보다 재판부에 대한 압력이다. 이젠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호소하고 비는 시대가 아니다. 당당하게 주장하는 차원을 넘어 여론 작업으로 압력까지 행사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집회는 걸유라기보다 압력이다.

미래권력의 도움, 권 시장에게 유리할까?

우리 법원이 권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상태인지에 대해선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것이다. 삼권분립 제도가 도입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는 재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젠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고, 치외법권 지대 같던 최고 재벌의 오너도 구속을 면할 수 없는 시대다.
 
법원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당 정치인이라고 봐주고 야당 정치인이라고 안 봐주는 판결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만일 곧 ‘문재인 대통령 시대’가 열린다 해도 그것 때문에 권 시장 재판 결과가 뒤바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오늘날 재판부가 두려워할 것은 법관 자신의 양심이 첫째고, 민심이 두 번째며, 권력은 마지막이다.

걸유는 순수한 민심을 전하여 법관(임금)의 양심에 호소하는 행위다. 오늘날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는 가능하고 때론 필요할 수도 있다. 봄맞이 대청소를 명분으로 1만 명을 모아 벌인 걸유 행사가 의도한 만큼 효과는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의 참석은 표를 얻으러 스스로 찾아왔든 이쪽에서 초청을 했든 걸유의 의미조차 퇴색시켰다.

권 시장 말과 행동, 시민들 양심 움직여야 미래 있어

권 시장이 시민들의 진정한 걸유를 원한다면 권 시장이 먼저 시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시민들의 양심을 흔드는 호소여야 한다. 시장의 말과 행동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이라도 늘어나야 한다. 대법원에서 다시 무죄를 받으면 더욱 좋지만 설사 시장직을 잃는 경우에도 자신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는 여전히 현직 시장이다.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 대전을 위해서, 시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이 많다. 권력과 군중을 동원하는 대규모 행사나 아시안게임 같은 거창한 프로젝트보다 작은 일이라도 나중에 “그거 권 시장의 공적이지!” 하는 얘기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대법원 재판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이 권 시장 정치 인생의 결말은 아닐 것이다. 권 시장에겐 아직 ‘남아 있는 배’가 있다고 생각한다. 배가 오고 안 오고는 자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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