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 속으로] <8>


베르사유 궁 조감도
베르사유궁의 전면 길이는 580m나 되며, 궁전은 광장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에워싼 말발굽(∩형) 모양이다. 약2만평에 이르는 베르사유 궁에는 방 700개, 창문 2,143개, 벽난로 1,252개, 층계만 67군데 있는데, 여기에서 왕과 왕비 이외에 500여 명의 귀족, 4,000여 명의 하인이 살았다. 베르사유 궁의 내부 관람은 오른편 방부터 시작하여 왼편 마지막 방으로 나오는 것이 정해진 코스인데, 각 방은 물론 이어지는 복도의 화려한 장식과 사방의 벽면에 전시된 중요한 궁중의 행사와 왕, 왕비들의 모습을 그린 크고 작은 캔버스 유화가 많다.

정승열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장
이것은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왕과 왕비가 자신들의 호사스런 모습을 남겨두고 싶은 욕망에서 유화를 많이 그리도록 하여 수많은 궁정화가들이 배출되었다. 또, 보다 가볍게 이동하며 그릴 수 있는 캔버스화가 발달했다. 또, 궁전의 각 방과 복도의 천정에는 사치스러운 가지각색의 산델리아가 장식되어 있다.

 베르사유 궁에서 수많은 방과 복도가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길이 73m, 폭 10m, 높이 12.3m,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는 ‘거울의 방(La galerie des Glaces)’이다. 1678년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가 지은 거울의 방은 거울의 방은 궁전 양쪽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넓은 프랑스식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거울의 방에서는 궁중의 중요한 회의는 물론 가면무도회, 온갖 연회를 가진 베르사유 궁의 메인 홀이었는데, 천장에는 르브룅(Le brun)이 루이 14세의 생애를 그린 천장화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고, 황금 촛대, 화병 등의 당시 최고급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울의 방 정면 발코니로 나와서 시위 군중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다.

거울의 방
한편,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이 이 방에서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1919년 6월 28일에는 이 방에서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거울의 방 중앙에 걸려있는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그림은 1830년 7월 28일 부르봉 왕조를 몰락시키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에 즉위한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정작 식장에 참석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의 모습과 엎드려 축하하는 조세핀의 모습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태양왕 루이 14세.
태양왕 루이 14세의 아들 루이 16세는 사실 정치력이 없는 무능한 군주였으며, 지극히 검소하여 시계조립이 유일한 취미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에 따른 정략결혼으로 애정이 없이 결혼하게 된 신성 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가 공주 출신인 왕비 마리 앙두아네뜨(1755∼1793)의 낭비벽은 프랑스의 재정을 바닥나게 할 정도로 심해서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었으며, 왕과 왕비는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세 때 프랑스의 루이 왕자와 결혼했는데, 왕자가 루이 16세로 왕위에 오르자 18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애정이 없는 부부생활로 무관심한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에 외롭게 지내던 왕비의 낭비벽과 성적으로 방종한 태도는 당시 군주제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왕비는 성적으로 무능했던 루이 16세를 제쳐두고 자신의 침실에 수많은 애인들을 불러들였는데, 심지어 왕비 자신조차도 그가 낳은 아기가 누구의 소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관람객들이 줄을 지어 둘러보는 ‘왕비의 침실(Chambre de la Reine)’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방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것으로서 거울 위에는 남편인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 그리고 오빠인 요셉 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침대 바로 옆에 작은 문은 왕비가 아이들 방에 곧장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방이 700개나 되는 베르사유 궁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아서 루이 14세는 시종들이 의자형 변기를 26개나 들고 따라다녔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전용 변기를 갖고 다니거나 용변을 볼 때마다 넓은 정원 속에 들어가서 실례(?)를 해야 했다. 그 결과 정원에서는 항상 지독한 악취가 풍기자 루이 14세는 악취를 없애기 위해서 1000여 그루의 오렌지 나무를 심고 오렌지 향으로 악취를 덮으려고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궁중관리인은 정원에 출입금지 표시판을 세우고 이 표시판을 에티켓(Etiquette)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에티켓은 ‘궁전을 출입할 수 있는 예의범절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변했다.
 한편, 거울의 방에서 매일 열리는 무도회 등에 참석하는 귀족 여성들도 정원에서 남몰래 볼일을 보면서 드레스가 더렵혀지는 것을 피해서 우리의 할머니들이 입었던 것과 비슷한 고쟁이 혹은 몸뻬 비슷한 중의(中衣)를 입고 드레스를 그 고쟁이 속에 넣은 뒤 볼일을 보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파리의 상류층 여인들은 드레스 속에 중의를 입게 되었으며, 다른 이들의 용변을 밟지 않도록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프랑스 절대주의의 또 다른 상징인 오늘날의 하이힐이 유행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침실
나폴레옹 황제대관식
아테네 학당
왕실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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