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가 본 고 송좌빈 선생의 길과 추모의 글

평생을 항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살아온 충청지역 민주화 운동의 대부 죽천(竹泉) 송좌빈 선생이 향년 92세로 2일 타계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디트뉴스와의 인터뷰 모습.

질풍노도와 같았던 지난 민주화 과정에서 충청의 정치인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획을 그었던 죽천(竹泉) 송좌빈 선생이 12월 2일 향년 92세로 영면하였다. 지역의 지식인, 시민에게 다소 생소한 인물일 수 있는 송좌빈 선생은 누구인가? 우리는 왜 그를 추모해야  하는가? 선생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다선의 국회의원도 아니었고 전직 국무총리이거나 장관직을 거쳤던 이력도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왜 그를 충청민주화의 대부로 부르는가? 많은 의문을 갖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민주화된 사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헌신하였고 민주화를 위한 격동의 과정에서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며 매 순간 양심을 잃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선생은 혼돈의 어두움 속에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던 우리 근현대정치사에서 영롱히 빛났던 보석이었다. 그는 하나의 밀알처럼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였고 위대한 삶을 살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신념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영면하던 날 우연의 일치일까 시민은 다시 촛불을 밝히며 ‘대통령 즉각 퇴진’을 크게 외쳤다. 서울의 광화문에서 광주, 부산, 대구, 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인 232만 명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밝혔다. 분노한 시민이 가득한 거리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양심, 정의의 촛불을 밝혀라!”고 당부했던 송좌빈 선생을 기억하였다. 이는 우연인 것인가? 충청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었던 고(故) 죽천(竹泉) 송좌빈 선생, 그는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민주화 운동의 족적은 우리 모두의 기억에서 역사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죽천 선생 민주화 운동 족적 역사와 함께 영원히 살아남아

윤기석 충남대 산학협력단 교수
이 글은 정치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故) 죽천(竹泉) 송좌빈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다. 독자에 따라 불편한 내용도 있을 것이며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오로지 필자의 사견이라는 전제 하에서 죽천 송좌빈 선생이 걸어 온 양심과 정의의 길이 무엇이었는가를 돌아보며 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주미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조명해 보기 위해 쓴 추모의 글임을 환기하고자 한다.

송좌빈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 대전 동구 주산동에서 태어났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11대 손인 그는 8세 때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영친왕의 시종관(정3품)을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는 왕세자의 비서실장과도 같은 시종관 직책을 수행한 분이었다. 이는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영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조부는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었던 영친왕을 볼모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는 상황을 보면서 조정으로부터 내려진 일본으로의 동행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한다. 이때 만일 영친왕을 모시고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부귀영화는 물론이고 친일파의 거두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향후 송좌빈 선생을 만든 가문의 정신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겠다.

선생은 일제 때 5년제 대전중학교(대전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그 후 선교사가 세운 자유로운 교풍의 경성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한글학자인 최현배, 김윤경, 그리고 정인보, 백낙준, 이관용, 조병옥 박사 등 훌륭한 인물들로 구성된 석학들로부터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진정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교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교육과정에서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의 독립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의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말 학도병 징집과 수탈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선생은 학도병 징집을 거부하고 충청도 민주지산으로 운신해 해방의 순간까지 움막생활의 고행을 한다. 해방이 오자 선생은 다시 연희전문에 복학하여 정치외교학과 1회로 졸업한다. 그 후 6.25 사변 때에는 자진 입대하여 정훈장교로 활동하게 되는데 정훈장교이지만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장병들 정훈교육 시간에 헌정질서와 언론자유의 필요성, 사사오입개헌이나 부산 프락치 사건 등 자유당정권의 독재 비판 등 정신 교육을 하면서 야당성향의 정치장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자유당 정부가 1954년 5월 20일 치러질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선생이 논산 지역구에서 출마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전역 일정을 고의적으로 늦추는 편법을 단행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선생은 군 전역 후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데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이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만든 사건으로 부결 선언된 개헌안을 자유당이 번복해 가결시킨 의회 쿠데타였고, 이를 본 선생은 정치참여를 결정한다.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실종을 지켜 본 선생은 이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길에 투신하게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치는 선생의 정치역정 속에서 평생 잃지 않고 일관되게 추구했던 가치였다.    

독재정권 탄압에도 DJ와의 정치적 신뢰 의리 저버리지 않아

죽천 송좌빈 선생
선생과 DJ와의 인연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67년 김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전국 순회 시국강연회를 하고 다닐 즈음 초대 받은 강연에서 DJ의 웅변에 심취한 선생은 우리나라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로 DJ를 선택하고 의기투합, 평생의 동지가 된다. 이후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독재정권의 탄압과 수난을 받으며 반독재 투쟁을 함께하는 민주화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며 1978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3년 실형을 받아 구속 수감되었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에는 DJ와의 관계 때문에 보안사에 연행되어 감금되는 등 감시와 연금, 압박과 모멸 등 온갖 고초를 다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단 한 번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신뢰나 의리관계를 저버리지 않았다.

특히 DJ가 고난의 시기를 보낼 때에는 모든 걸 다 동원해서 헌신적으로 그를 도왔다. 이희호 여사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송좌빈 선생과의 인연을 아직도 생생하게 추억한다고 한다. 신변의 위협이 서슬 푸른 칼날처럼 위태로 왔던 5공 신군부의 치하에서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DJ와 면회가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선생은 늘 교도소로 가족과 함께 찾아가 힘과 위로를 주었기에 한 없이 감사한다고 한다. 이는 한 달에 한 번씩 바깥으로 나오는 DJ의 깨알 같은 옥중서신에도 나온 일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송좌빈 선생이 김대중 전 대통령 개인에게 충성하기 위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에게 의탁해 재산을 모으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자 살아온 것은 더욱이 아니었다. 선생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삶의 가치와 철학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았기 때문에 고락을 함께한 것이었고,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이 지도자밖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왔던 것이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DJ가 정권교체를 이룬 것을 보았을 때 선생은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대전 동구 주산동의 집에서 지리산 흑돼지 두 마리를 잡아서 동네사람들은 물론 그동안 고생했던 동지들, 정권교체를 갈망했던 사람들 모두를 초대해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선생은 김대중 정부의 성공을 위하여 그 어떤 공직을 맡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조차 함부로 나서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단속했다. 이는 커다란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국민의 분노가 일촉즉발인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면 선생의 처신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선생은 ‘이인제 대망론의 충청권’에서 지지율이 매우 낮았던 노무현 후보를 고독하게 지지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전국 강연을 하고 다니면서 충남대학교에 왔을 때에는 수행한 인원 몇몇을 제외하고는 좌석이 거의 비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선생은 이 침울한 상황에서 홀로 단상에 올라서서 장장 40분 이상을 노무현 후보 지지 발언을 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이 광경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객석이 거의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한 노 정객이 뜨거운 마음으로 열변을 토해내자 노무현 후보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보면서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며 2004년에 정계를 은퇴했다.

국회의원 배지 두 번이나 마다한 무관(無冠) 정치인

그런데 우리는 송좌빈 선생을 무관(無冠)의 정치인이라 부른다. 보통의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했어야 할 국회의원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국회의원선거에 3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총선 출마는 당선만이 목적이 아니었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독재 투쟁의 수단으로, 그리고 DJ를 도와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출마였다.

그러나 무관의 정치인에게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5공 시절, 윤보선 전 대통령이 전두환 신군부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탓에 그 대가로 당시 어용관제야당인 민한당 쪽의 국회의원 5개자리를 할당받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는 이 중 하나를 송좌빈 선생에게 주려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원범 의원을 통해 이를 직접 제의했다고 한다.

사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왔던 죽천 선생의 정치적 대부였다. 그러나 선생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신군부와 야합하고 변절했다고 보고 “부당한 제안”이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과거에 유신 때 윤보선이 써준 ‘민주회복’이란 휘호까지 불태워 없애려 했다. 그러자 친척이 나서 ‘그래도 이 나라 대통령을 지낸 분의 휘호’라며 가져갔다고 한다. 선생은 이렇게 전직 대통령 윤보선과 의절하고 그가 서거할 때까지 왕래를 끊는다.

또 다른 기회는 1988년 13대 총선 때였다.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DJ는 선생에게 비례대표를 권했다. 그러나 선생은 “젊고 유능한 동지들을 선발하라”면서 거절했다. 그러면서 몸소 정치적 조건이 열악한 지역구에 출마하여 패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충청권 재야인사의 대부로 변함없이 정치현장의 중심에서 DJ와 함께 행동하면서 한국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왔다.

정치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출직에 있다. 국회의원 배지는 한 평생을 정치인으로 산 정치인에게는 얻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리를 양심과 신념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숨에 거절하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선택한 선생의 용기는 커다란 귀감이 아닐 수 없다. 40년 이상을 정치 일선, 수난과 격동이 몰아치는 정치현장의 중심에 있으면서 굴러들어 온 금배지를 두 번씩이나 거절한 정치인, 해방 이후 70년 간 대한민국 정당사에 과연 누가 있었겠는가? 정치의 세계가 권력을 추구하기 위한 탐욕의 장이고, 배신과 변절,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물든 혼탁한 곳이라고 봤을 때 선생은 두 번이나 금배지를 걷어찬 것이다. 죽천 송좌빈 선생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지난 2013년 10월 31일 구순(九旬) 축하연에서의 송좌빈 선생 모습.
기존 정치인과 다른 행동하는 양심 보여준 지식인 송좌빈

정치의 길은 여럿이 있다. 정치의 길을 추구하는 방법도 여럿이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를 보면 국회의원 중에 ‘의원’은 많이 있어도 ‘선생’으로 불리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이는 배지를 얻기 위해서 혹은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의원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정치인이었지만 기존의 정치인과는 다른 정치인의 길을 보여준 행동하는 양심, 지식인이었다.

박 대통령의 탄핵 시국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오늘, 선생이 한 평생 추구했던 시대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져 거리에서 촛불로 밝혀지고 있다. 사회적 정의를 회복하자는 거리의 외침과 함성, 이 뜨거운 열기는 우연히 거리에 모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다. 선생처럼 자신의 삶, 가족의 희생을 던져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던 행동하는 양심이 광장으로 모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프랑스 68혁명의 행동하는 양심, 장 폴 사르트르의 “지성은 실천을 할 때 빛이 난다”는 말처럼 선생은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상황에서 옳고 그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판단했고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결단한 지식인의 사표이었다. 격동의 한 시대를 살다 간 고인을 보내며 그가 구순을 맞이하면서 했던 말이 다시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진다.

“우리 사회는 지금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다. 역사는 반드시 발전한다. 소수라고 실망하지 말라. 다시 촛불을 켜고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도록 노력하라.” 이 단호한 메시지는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다.

고개 숙여 삼가고인의 명복과 유족에게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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