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박사의 그림으로 만나는 천년 의학여행] <11> 이발사와 외과의사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의관 앙부루아즈 파레(1572)

우리들은 이발사가 고대 중세시대에는 외과의사 역할을 하였고, 현재 이발소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흰색의 표시등(標示燈)이 동맥, 정맥, 붕대를 의미함을 알고 있다.

15~16세기의 고대 유럽에서는 외과학이라는 별도의 의학분야가 없었고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의사의 역할을 이발사가 겸하는 천한 일로 치부되어 왔기에 곧 옛날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와 동일한 직업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외과의사와 내과의사가 동등한 의사가 아니었다. 치료법에 약초를 주로 이용하였기에 약초학자라고도 불렸던 내과의사들은 종기나 단순 열상만을 치료했던 외과의사들을 경시했다. 심지어는 이발사들의 겸업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전문적 의술 수행법 제정의 권한을 갖고 의사 자격을 수여했던 사람들, 런던의 주교나 성 바울 성당의 수석 사제여서 교회에서 주장하는 치료 목적과 부합되는 내과, 약초학자들의 편을 들었다.

반면 외과의사들은 더 낮은 지위인 제빵사, 양조자, 공증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낮은 계층으로 전락했고 그 수도 극히 적었다. 아직도 영국에서는 내과의사를 닥터(Doctor)라 부르지만 외과의사는 그냥 미스터(Mister)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중세시대 영국의 해부 실습(1522년 이발사 외과의사들, 의학교과서 삽입)

<그림>에서 보듯이 1522년경 중세시대 해부실습시 정중앙에 정좌한 교수의사가 사체의 특정 장기의 해부를 지시하면 실습대 주위의 이발사들이 해당부위를 해부해 보였다. 당시 외과의사들은 뒤에서 관람만 하고 실제로 사체해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교수는 막강한 권위로 모든 수술을 지휘했고 소수의 외과의사는 이발사 외과의사들의 해부와 수술을 견학하는 것 외에는 임상에서 단순한 종기 배농이나 열상의 치료에만 참여했다. 삽화 하단에 개가 사체의 일부를 뜯는 모습으로 보아 위생 관념은 엉망이었다.

당시의 외과 치료는 그림에서와 같이 이발소 내에서 이발 작업과 수술치료가 한곳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마침내 1540년 영국의회는 이발사 2명과 외과의사 2명 등 4명의 주임을 두면서 이발사외과의사 조합을 승인했다.

이후 외과학은 약 250년이 경과된 18세기까지 내과학에 가려졌고 이발사 외과의사협회 소속돼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주임 의사이자 헨리 8세의 시의(侍醫)였던 토마스 바카리가 왕의 까다로운 다리 상처를 치료하는 데 성공하면서 외과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강의를 하고 수련의 훈련을 감독하며 제대로 훈련 받지도 않은 채 시술을 하는 돌팔이 의사들을 색출하면서 점차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주임 이발사는 왕과 왕실의 토요일 목욕행사를 비롯하여 왕이 머리와 다리, 발을 씻고 싶을 때 항상 대령해야 했다.

외과학을 개혁하고 혁신하게 된 사람은 이발외과의사 중에서 등장하였는데, 프랑스 라발에서 태어난 앙부루아즈 파레(1510-1590)였다. 파레는 이발외과의사로 몇 년간 세계 최초의 의과대학인 파리의 오웰-디외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1차 세계대전 중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그때까지 총상과 열창을 치료하는데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소작법(燒灼法)과 끓는 기름을 바르는 방법을 반대했다. 대신 출혈중인 혈관을 봉합한 뒤 달걀흰자와 장미기름, 테레빈 유로 만든 치료용 고약을 사용하여 그간 총상 및 절단 병사들을 지독한 통증, 염증, 부기 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1545년 그가 발표한 총상 치료에 대한 논문이 의학논문의 고전이 되면서 그는 유명한 상콤대학의 교수가 됐다. 이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외과의사에게는 이례적이었다.

중세시대 영국 이발소 내에서의 동시 이발작업과 수술치료(1540년 영국 외과학 교과서 삽입)

그 후 효과적인 피부봉합술, 팔다리의 절단 후 기능성 보조기, 방광결석 제거술 및 탈장용 밴드, 틀니와 의안(義眼)등을 고안해 개선했다. 무엇보다도 미라 가루, 빻은 유니콘 뿔, 동물의 담낭결석 등 진부한 치료제들이 마법의 치유력을 가진 듯 널리 사용되는 것을 엄격히 억제시켰다. 군진의학의 효시(嚆矢)를 이룬 그는 오늘날 근대의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후 200년이 지난 후 런던 성 토마스 병원에 있던 체즐 던이 정자가 요도를 지날 수 있도록 분비물을 내는 쿠퍼선(線)을 발견하고 결석 쇄석술을 시도한 후 해부외과를 창설했다. 이를 계기로 1745년 외과의사 협회가 이발사 외과의사 협회에서 분리 독립됐다. 마침내 두 집단의 업무가 분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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