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1>관음봉아래 애추(너덜바위)를 아시나요?

싱그러운 가을날 계룡산에 올랐다. 산행코스는 동학사에서 은선폭포를 거쳐 관음봉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계룡산의 여러 등산로 중 제일 힘든 일명 ‘마(魔)의 코스’다. 이 등산로는 은선폭포를 지나 관음봉 바로 밑에 형성된 애추지형(너덜바위 지대/돌의 잔 부스러기)에 들어서면 자신의 인내를 시험케 하는 험난한 길이다.

필자가 이 코스를 택해 계룡산에 오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곳 애추지형에 새로운 우회 탐방로가 완성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른 하나는 은선폭포의 멋진 광경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뜻하게 않게 가을비가 내리게 된 것도 이곳을 찾게 된 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학사를 지나니 계곡에 반가운 물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까지 계룡산의 계곡이란 계곡에 전부 물이 흐르지 않았다. 해서 ‘여름 철 장사 망쳤다’는 동학사주변 상가주인의 볼멘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제법 물이 흐른다. 계곡을 타고 15분 올라가니 예전의 병목현상을 일으켰던 오른편 ‘제1의 마(魔)의 코스’가 나온다.

하지만 우회 탐방로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예전에 이곳을 오르려고 하면 한숨만 나온 곳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급경사인데도 제대로 된 길이 없어 쉽게 오르지 못했다. 중간에 아주머니가 한명만 있으면 정체가 심해 오르고 싶어도 못 오르고 그냥 앞사람의 뒤꿈치 만 보고 올랐던 추억의 길이었다. 지금은 깔끔한 목재 데크 덕분에 비교적 쉽게 1차 관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벌써 숨이 목까지 오르고 등은 땀으로 흥건하다.

힘을 내어 오르기를 20여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 폭포소리가 나를 반긴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곧 다가올 것 같은 폭포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이를 실감한다. 산에 가면 나이를 알 수 있다고 하더니. 이제 내 나이가 50대 후반이 아닌가. 20대는 20분, 30대는 30분, 50대는 50분이 소요된다는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실감난다. 예전에는 정말 쉽게 올랐던 것 같은데 지금은 너무 힘들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오늘 오르지 못하면 나중에는 더욱 더 힘들겠지’하고는 다시 배낭을 멨다.

다시 몇 번의 굴곡 된 길을 극복하니 길 왼편에 은선폭포 안내판이 반긴다. 반가웠다. 은선폭포(隱仙瀑布)는 계룡8경 중 제7경으로 ‘신선이 내려 와 소요(逍遙·거니는 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내판을 보니 길이 46m, 폭이 10m, 경사는 60°라고 한다. ‘이 정도 폭포면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들겠지’ 하면서 한참동안 조망(眺望)하니 지난날이 떠올랐다.

필자는 비가 온 다음날 새벽에 은선폭포를 자주 찾았다. 안개에 싸인 은선폭포는 금방 용(龍)이 확 튀어 나올 만큼 신비스러웠다. 그 후에는 오랫동안 자주 폭포에 왔건만 물이 없어 폭포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었다. 그런데 오늘 그 아쉬움을 모두 해결했다. 더구나 여름이 아닌 가을철에 은선폭포에서 이만한 물줄기를 관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이제까지 본 은선폭포 중 가장 멋진 풍경이다. 다음에는 화첩을 가져와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10여 분 간 폭포에서 물맛사지(?)를 받고 나오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폭포를 지나니 예전의 ‘은선산장’이다. 지금은 황량한 풀밭이다. 귀퉁이에 수량을 측정하는 이상한 기계(?)만 보일 뿐이다. 환경정화라는 이름으로 산장을 없애는 것은 좋지만 계룡산에 이렇다 할 산장하나 없는 것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크다. 예전에 이곳에서 라면 먹던 일, 산악회 모임 하던 일, 하룻밤 신세지고 갑사로 넘어가던 일 등이 머리에 스친다.

이 장소를 활용해 산악인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고민해 볼 문제다. 아니면 산악구조대라도. 오래전 이곳에 계셨던 김기순(金基順· 당시71세) 할머니가 눈에 선하다. 김 할머니는 40대 초반이던 지난 1968년 계룡산에 들어와 그때까지 40년 넘게 산장을 지키며 외길 인생을 걸었던 분이다.

당시 할머니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젊었을 때부터 산을 다녔는데 설악산은 올곧아서, 오대산은 후덕해서, 지리산은 장중한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모든 산 중 계룡산만큼 신비하면서도 포근함이 있는 곳은 없어 이곳에 정착하게 됐지요.”

할머니는 이 산장에서 라면 등 많은 간식을 파셨는데 특히 당귀차의 맛이 일품이었다. 필자가 어디서 배웠냐고 물으니 의외로 한국산악회 회장이던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선생한테 배웠다고 하셨다. 당시 그윽한 맛과 향이 일품인 당귀차를 한 잔 마시면 이곳까지 오느라고 힘들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곤 했다.

이젠 할머니도 당귀차도 없고 그저 황량할 뿐이다. 다 추억일 뿐이다. 그 할머니가 더 보고파진다. 어디에 계신지 알았으면 안부라도 전하고 싶다. 옛 산장 좌측 계곡은 계룡산의 동학사계곡, 즉 학봉천(鶴峰川)의 발원지다. 이 조그마한 계곡이 은선폭포를 만들고 동학사 계곡을 이루어 내려가다 밀목재(密木峙)에서 발원한 용수천(龍水川)과 합류하여 반포(反浦)를 거치면서 마지막에 금강으로 흡수된다. 계룡산 계곡 중 가장 긴 계곡이 바로 이 동학사계곡이다.

다시 물 한 사발 먹고 길을 나선다. 옛 은선산장을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심해진다. 돌과 바위의 연속이다. 이곳은 소나무 등의 침엽수보다는 키가 큰 굴참나무·느티나무·까치박달·졸참나무·쪽동백 등이 즐비하다. 숲이 우거져 여름철에도 해를 직접 받지 않고 산행할 수 있는 곳이다. 쭉 이어진 돌계단을 헐떡이며 밟고 오르기를 20분 정도 하니 갑자기 경사가 더욱 심해진다. 주변의 감상은커녕 앞 사람의 발자국만 보고 따라가야 한다. 돌계단 하나하나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주변 모두가  돌 뿐이다.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예전에 없던 목재 데크가 눈앞에 확 들어온다.

오늘 산행에서 보고자 했던 애추고개 우회탐방로이다. 관리사무소 측에서 탐방로를 설치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니 데크가 의외로 끝이 없다. 알아보니 목재 데크가 128m, 돌계단이 32m다. 하지만 산에서의 길이는 평지보다 훨씬 길었다. 중간에 전망대도 하나 있다. 확 달라졌다. 우회탐방로가 있기 전 이곳은 돌의 잔 부스러기와 작은 바위들로만 이루어졌었다. 때문에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거기에다 계룡산 등산로 중 가장 급경사였다.

산에 제법 오른다 하는 산악인들도 단숨에 확 오르려다가는 큰 코 다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오죽했으면 ‘마(魔)의 코스’라고 했을까. 뒤에 따라오는 서울의 한 등산객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데크를 하나하나 오르면서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내가 옛날 우회로 설치 이전의 사실을 말하니 깜짝 놀란다.

애추지형(너덜바위 지대)에 우회 탐방로를 개설한 것은 이곳이 낙석위험이 있어 안전사고 예방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이것보다는 애추지형을 보호(?)한다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이유에서였다. 일반적으로 ‘애추’라 함은 한자로는 ‘벼랑 애(崖)’ ‘송곳 추(錐)’로 ‘낭떠러지 밑이나 산기슭에 풍화 작용으로 인하여 암석 조각이 떨어져서 생긴 반원 뿔 모양의 퇴적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해 그냥 ‘암석조각’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얼음의 쐐기 작용으로 떨어진 암석이 송곳모양으로 형성된 지형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너덜겅’ 혹은 ‘너덜지대’, ‘돌서렁’으로도 불린다.

설악산이나 오대산 등 우리나라 큰 산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산행을 하다보면 산 건너편 중간지점에 하얀 바위돌이 깨진 모습들이 바로 이것들이다. 오늘 본 관음봉삼거리 아래의 애추는 애추지형으로는 제법 큰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환경부에서 이곳을 ‘지형경관 보존지역’으로 지정하고 애추를 보존하기 위해 우회로를 개설한 것이다. 물론 애추로 인한 낙석위험을 방지하는 것도 한 이유로 볼 수 있다.

전망대에 서니 조망이 그만이다. 계룡산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눈앞에 삼불 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단풍이 산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고 있음이 확연하다. 동학사 계곡의 골이 얼마나 깊은가도 실감된다. 예전의 ‘할딱고개’ ‘보살너덜이 고개’ ‘마(魔)의 고개’가 지금은 ‘애추고개’로 바뀐 것이다. 필자는 한동안 애추지형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을 스토리텔링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여기를 다녔던 지난 날 추억을 반영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동조할 것이라고 본다. 애추지형에 대한 자세한 안내판도 필요하다.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하나 만들 필요도 있다. 그냥 돌덩어리가 아니라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상기시켰으면 한다.

가을밤은 깊어간다. 오늘 산행에서 보았던 은선폭포와 애추가 자꾸 보인다. 아마 다음 주 부터는 계룡산의 단풍이 서서히 물들면서 그 다음 주에는 본격적으로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을까 한다. 그동안 단풍하면 갑사주변을 꼽았는데 이젠 관음봉아래 애추고개로 가보자. 거기서 새로운 계룡산의 진면목을 느꼈으면 한다. 단하나, 아직도 그곳 산행은 만만치 않으니 한 바가지 땀을 흘릴 각오가 있어야 한다. 만약 용기를 내어 은선폭포를 보고 애추고개를 넘는다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은 물론 멋진 추억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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