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의 오량가산책] 배재대 입학사정관 | 전 대전대신고 교장

퇴직한 뒤를 생각해서 근교에 작은 밭을 한 필지 장만했다. 자동차로 한 시간 가까이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인지 자주 찾아가질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어른에게 농사를 짓도록 맡겨두고, 한 쪽 귀퉁이에 넉넉하게 야채를 심어두었다.

그리고 한 달에 두세 번씩 어머니와 아내랑 함께 가서 땀을 쏟았다. 밭에 갈 때마다 뽑아버려도 잡초는 이내 뿌리를 내리면서 끈질긴 생명력과 무서운 번식력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슬로건을 내걸고 민생 치안을 담당했던 정부를 떠올리면서 ‘우리 식구들은 풀과 전쟁을 치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먼저 땅을 파고 흙을 고른 뒤에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둔다. 그 위에 씨앗을 뿌리면서 흙을 덮어주면 딱딱한 껍질을 깨뜨리고 작은 알갱이 속에서 어린 싹이 땅을 헤집고 올라온다. 그러면 새싹이 자라는 동안에 거름을 주고, 수분과 햇볕을 공급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틈틈이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병해충을 제거하며, 잡초를 뽑아 농작물이 잘 자라서 결실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농사짓는 일은 쉽고 재미있거나, 도회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활동은 결코 아니다.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들에 나가서 비바람을 맞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땅을 갈고 흙을 부수며 씨앗을 뿌린다. 뜨거운 여름 내내 햇볕에 그을리고, 비 오듯 땀을 쏟아내면서 자라나는 농작물과 함께 생활을 한다.

밭에 가는 날이면 풀과 사투를 벌인 뒤에, 어머니와 아내는 전리품으로 얻은 열무·오이·시금치 따위를 품에 안고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다. 그럴 때면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기름 값 생각하면 우리는 참 비싼 채소 먹는다”라고 말하면서도 수확하는 기쁨에 마냥 즐거워하신다. 아내는 농약을 적게 살포해서 친환경으로 먹을거리 가꾸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늦도록 일을 해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벼웠다. 집에 도착하면 아내는 차에 싣고 온 보따리를 꺼내 ‘보기보다는 맛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덤으로 얹어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한 움큼씩 건넨다. 그러면 며칠 후에 시장에서 파는 것과 달리 싱싱하고 깊은 맛이 있어서 좋았다는 대답을 전해들을 때엔 마냥 뿌듯하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뜨거운 낮 시간을 피해서 아침 일찍 밭에 나간다. 여러 날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는 목이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물을 주고 잡초도 뽑는다. 이때 모자를 적신 땀방울은 눈으로 파고들고, 얼굴과 상체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온몸이 땀으로 미역을 감는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은 바지를 타고 내려가 장화 속에 고이면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찔꺽거린다.

한낮에 훅훅 열기를 뿜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입 안과 목 줄기가 타들어가면서 팻트병에 가득 든 얼음물 한 통도 금세 비운다. 점심때가 되면 도시락이나 간단히 준비해 간 토스토와 과일로 점심식사를 마친다. 그리고는 지친 몸을 풀밭에 눕히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해충이나 쯔쯔가무시를 옮기는 진드기 때문에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농사는 끝이라고 아내에게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 때 뿐이다.

봄이 돌아오면 씨앗을 뿌려놓고 그것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밭에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밭에 들리면 호미나 낫을 들고 이랑 사이를 돌아다니게 된다. 이처럼 생명을 가진 작물이 자라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농심인가 보다. 그러니까 농사꾼은 아기를 기르는 어머니와도 같다. 애기엄마는 말 못하는 발가숭이가 배고파하는 것을 보면 꼭 끌어안고 젖을 먹인다.

몸에 오물이 묻으면 깨끗이 씻겨주고, 한 밤중이라도 어린 것이 칭얼댈 때에는 일어나서 보살핀다. 날씨가 덥거나 추우면 옷을 갈아입히며, 실내온도를 조절해서 평안하게 잠잘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열이 나거나 설사를 하면 약을 찾아 먹인다. 이처럼 농부들도 때를 따라서 작물이 필요로 하는 물과 거름을 주며, 괴롭히는 해충을 제거하고, 토양을 관리하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농사는 팔 할이 하늘이 짓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농사일을 하면서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흙의 속삭임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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