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7>암용추와 수용추의 비밀

기묘한 형상의 암용추와 수용추

계룡산의 자연자원 중 최고의 명물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견해는 있겠지만 대다수는 신도안의 암용추·수용추를 뽑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는 계룡대 영내에 있는 이 두 용추(龍秋)는 한반도내, 아니 지구에서 자연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젊은 시절부터 실크로드를 탐사하면서 전 세계 이름난 유적을 둘러보았지만 신도안의 두 용추보다 더 신비하고 오묘한 절경은 보질 못했다. 계룡대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이 이곳에서 근무한 뒤 떠나면 계룡대 주변경치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바로 두 용추라고 한다.

두 용추의 유래는 생김새로 기인된 지명(地名)이다. 암용추는 수용추보다 더 넓은 바위에, 웅덩이가 패여 깨끗한 물이 고여 있는 모양이 여자의 생식기를 연상케 한다. 수용추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과 웅덩이 모양이 남자의 성기를 닮았다. 수용추는 암용추보다 물이 더 깊고 위와 아래에 2개의 웅덩이가 있다. 우기(雨期)가 되는 여름철 수용추를 바라보면 한반도에 이런 절경이 있나 싶을 정도의 경관이다.

수용추의 생김새는 폭포 위로 올라가 보아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좀 우습지만 영락없이 남자의 물건(?)을 빼 닮았다. 양 용추는 이런 연유로 성기숭배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아낙네는 수용추에서 계룡산 신에게 기도를 드렸고, 딸을 원하는 부부는 암용추에서 정성을 드렸다. 자연히 암용추는 남자들이 자주 찾았으며 수용추는 여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계룡산 정기(精氣)를 흠뻑 받은 양(兩) 용추에는 용에 관한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용추는 신도안과 함께 계룡산을 유람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용추는 단순히 구경만 가는 곳이 아니었다. 혹자는 자신의 영적(靈的)인 기도(祈禱)를 위해, 혹자는 무엇인가 갈망(渴望)을 위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용추가 갖는 용과 관련한 신비스러운 기운(氣運)과 조화(造化)가 있다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계룡산 유기에는 대다수가 신도안에서 용추로 가는 길과 전경(全景), 그리고 용추의 모습에 대해  상세히 표현했는데 이는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용추에 얽힌 전설

이 두 용추(龍秋)는 시원스레 부서지는 물소리와 바위벽과 숲이 함께 어우러져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만히 용추를 바라보노라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다. 왜 이곳에 도인(道人)들이 몰려들었는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용추 양쪽 바위벽에는 이곳에서 갖가지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신도안 암·수용추가 무속인들이 찾는 ‘별천지’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용추라는 이름이 드러내 주듯이 이곳에서는 용이 도를 닦아 승천했다고도 한다. 계룡산 정기를 흠뻑 받은 양(兩) 용추에는 용(龍)에 관한 전설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고 있는데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옛날 계룡산 땅속에 암용과 수용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때가 되면 하늘로 올라갈 것을 기대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두 용은 계룡산 밑을 파서 산의 물을 금강으로 흐르게 하였고, 땅속으로는 신도안에서 갑사·동학사·신원사 쪽으로 어디든지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명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참으로 깨끗한 용들이었고 항상 하늘에 올라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땅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이무기들은 추잡하게 살면서 그들도 하늘의 부름을 기다렸다. 용들은 그런 이무기들을 가소롭게 여겨 추잡한 행동을 보지 않으려고 몸을 땅위에 전혀 나타내지 않은 채 굴속과 물속에서만 지냈다. 용들은 몹시 비가 내릴 때나 천둥이 칠 때 혹시 하늘에서 자기들을 부르지나 않을까 하고 굴속에서 눈을 내놓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루는 몹시 비가 내리는데 밖을 내다보는 것을 잊고 땅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용들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어 더 큰 목소리로 부르자, 그때서야 알아듣고 굴속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대체 너희들은 하늘의 부름을 거역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항상 땅에서만 살려고 하느냐”하고 하늘에서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용들은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세요”하고 빌면서 애원했다. 그러자 “땅의 껍질을 벗겨라. 그리고 언제든지 하늘에 올라올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너희들의 정(情)이 너무 지나치니 따로 따로 자리를 정해 다시는 만나지 마라”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더니 날씨가 잠잠해졌다.

그들은 헤어지기가 아쉬웠지만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하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제각기 장소를 정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암용은 물이 꼬불꼬불 흘러내리다가 맑은 소(沼)를 이루는 장소를 택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수용은 계룡산의 정기가 흐르듯 맑은 물이 흐르다가 폭포를 이루는 아래쪽 계곡에 자리를 잡고 땅을 파들어 갔다. 이제는 하늘에 올라갈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용들은 이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못에서 살그머니 머리를 내미니 하늘에서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올라와라”하는 것이었다.

그 후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이곳 사람들은 암용이 하늘로 올라간 자리를 암용추, 수용이 올라간 자리를 수용추로 불렀다. 또한 암용추와 수용추는 옛날에는 땅속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두 용이 땅속을 통해 서로 만났다고도 전해진다. 실제로 암용추와 수용추는 직선거리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계룡산 정상에서 보면 같은 능선 상에 있다. 또 두 용추는 수심이 4~5m정도 이며 이곳을 제외하고는 계룡산 어느 바위에도 이런 깊고 아름다운 웅덩이가 없다.

주민들 기도 들어준 영험한 힘

암용추와 수용추의 신비스러움은 수 없이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엄청난(?) 사실이 하나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58년 전 그러니까 1958년 여름, 당시 두마면 부남리 수용추 계곡 인근에는 임도(林道)를 내기위해 산길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지역에는 기암괴석 등 암반이 많아 공사가 꽤나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공사업체는 폭약을 이용, 돌을 부수곤 했는데 어느 날 폭파 후 불행히도 수용추는 물론 수용추계곡 곳곳이 돌로 메워져 버렸다. 이를 안 주민들은 이곳엔 용이 살았고, 계룡산신이 있는 곳이라며 하루 빨리 메워진 수용추를 복원하라고 공사업체에 요구했다. 주민들은 만약 이 돌멩이들을 치우지 않으면 계룡산신이 노해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계곡이 워낙 깊고 인근에 마땅한 공터가 없어 치울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마을 주민들은 회의를 열고 수용추 앞에서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고 용왕과 산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인간들의 힘은 미약해 이 돌멩이를 치울 수 없으니 신(神)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구(懇求)한 것이다. 주민들은 이 같은 기도를 연이어 3번이나 올렸다. 기도가 끝난 후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다음 날 새벽 주민들이 계곡을 가보니 바위 돌로 메워졌던 수용추는 단 1개의 돌멩이도 없이 예전과 같아졌다. 기도의 영험인지, 많은 비 때문인지 몰라도 수용추는 감쪽같이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그 후부터 주민들은 비가 오던 날 수용추 속에 있던 수용이 승천하면서 주위를 깨끗이 정리했다고 믿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신도안 주민들은 수용추의 신비스러움을 똑똑히 목격하였으므로 이 일대를 신이 있는 곳이라고 더욱 깊이 믿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년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계룡대로 수용된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반복됐다고 한다.

계룡건설 이인구 회장과 용추

수용추를 즐겨 찾던 계룡대 근무 해군 장교는 몇 해 전 여름, 많은 비로 돌멩이가 떠 내려와 수용추가 메워졌다고 필자에게 전했다. 그러나 한차례 큰 비가 온 후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수용추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며 즐거워했다. 신도안의 수용추와 암용추. 그곳은 신(神)이 살아 꿈틀거리는, 인간이 동경하는 영원히 신비한 이상향(理想鄕)이 서려있는 곳이다.

양 용추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逸話)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계룡건설과의 이인구(李麟九) 회장과의 인연이다. 이 회장은 처음 회사를 설립하면서 계룡산을 너무 좋아하여 ‘계룡건설’이란 상호를 정했다고 한다. 이후 계룡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이다가 자주 신도안 수용추와 암용추를 찾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이 회장은 양용추에 용이 살고 있으면 반듯이 용추에 용의 알(龍卵)이 있다는 확신에 용란 찾기에 나섰다. 이런 바람을 계룡산신령이 도와주셨는지 얼마 후 암용추에서는 암용추 형상을 한 ‘암용추 용란’을, 수용추에서는 수용추 형상을 한 ‘수용추 용란’를 찾았다고 한다. <사진 참조>

이후 이 회장은 자신의 집무실에 이 양 용란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계룡건설이 오늘날까지 실패 없이 잘 성장하는 것은 아마 두 용란이 잘 보살펴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 사실에 대해서는 믿거나 말거나.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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