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의 오량가산책] 전 대전대신고 교장 | 배재대 입학사정관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서당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마을사람들은 그 분을 ‘훈장 어른’ 혹은 ‘어르신’이라고 부르면서 예를 갖추었다. 지난 날 높은 벼슬을 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서당선생님을 존경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찾아가 의논하고, 공동체의 일을 결정할 때에는 모여서 그 어른의 말씀을 경청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정교육은 아버지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며,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보살피고 감싸 안는 엄부자모(嚴父慈母)의 형태였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으면, 어머니가 데려다가 자상하게 타이른 후에 아버지께 들어가 용서를 빌도록 다독였다. 그래서 가정에는 질서가 섰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른을 공경하는 생활을 해왔다.

내가 어렸을 때에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거의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 다가가기가 무척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식사시간에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우리들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밥만 열심히 먹었다. 가끔 동생들과 이야기라도 나누게 되면 “복 달아난다. 조용히 밥 먹어라”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숟가락 닿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만 들렸다.

어쩌다가 밥상에 김이나 생선이 놓여 있어도 그 쪽으로 젓가락을 건네지 못하고, 먼저 아버지가 잡수시고 난 뒤에 집어주셔야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을 때에는 우리끼리 떠들고 장난치다가도 어머니가 아버지 오신다는 말씀을 하면 마루 끝에 나가 인사를 드리고는 슬금슬금 공부방으로 건너가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지내곤 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아버지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아이들이나, 가족끼리 다정하고 화목하게 생활하는 집안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재미있고 화기애애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요즈음 어머니들 사이에는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면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빠의 무관심 그리고 엄마의 정보력이 있어야 한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우리의 교육관과는 많이 다르다. 내가 성장할 때에는 아버지들이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하셨다. 자녀들의 진학이나 진로를 선택하는 중요한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최종 판단을 기다려야 했는데, 지금은 아버지들이 알지 못한 채 어머니의 손에서 결정되는 가정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가족제도도 예전과는 달리 대부분 핵가족 형태로 어느 집이든지 왕자와 공주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남보다 더 좋은 것과 맛있는 것만 입히고 먹이며 아이들 중심으로 생활을 꾸려나간다. 그러니까 부모님은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는 청맹과니가 되기 쉽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영재인 줄로 착각했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고집이 강하고, 부모님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본위로 함부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지도 못하고, 이웃 어른들이나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대할 때도 예를 갖추지 못하는 아이들이 퍽 많다.

집집마다 자녀들을 너무 귀하게 길러서 걱정이다. 아이들은 예쁘고 귀엽지만, 강인하지 못 해서 온실 속에서 자란 꽃처럼 허약하다. 허드렛일은 자녀들에게 시키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가 사용하는 방을 제 손으로 청소하지도 않고, 심지어 빗자루 질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 어려서부터 힘을 쓰는 일은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 근력도 없이 덩치만 커다랗다.

‘엄한 부모 밑에 불효자식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지금은 자녀들이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어머니들이 바르게 판단하고 가르쳐야 가정과 사회가 튼튼해진다. 가정에서의 바른 교육이 질서 있고 균형 잡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집안에 어른이 계셔야 아이들이 윗사람 어려운 줄 알고 예절바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고, 사회에 원로가 계셔야 혼란스러울 때 충고와 질책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원로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 모두가 그 분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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