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의 눈] 좌충우돌 동네 시의원의 의장 성공기

2006년 어느 날 밤, 그와 나는 택시 안에 앞뒤로 앉아 있었다. 흔히 말하는 1차를 마치고 2차를 가던 중으로 기억한다. 불콰해진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의원님더러 외골수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타일 좀 바꿔볼 생각 없으세요?" 그는 씨익 한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지금이 좋아, 그냥 마이웨이 할래." 그때 그의 말은 '함부로 애틋하게' 와 닿았다.

당시 난 햇병아리 기자였고, 그 역시 그해 기초의원(시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다. 빈약한 내공의 그는 무작정 정의로웠고, 때론 즉흥적이었다. 마치 풍차만 보며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괴짜'나 '문제적 인물'로 치부했다. 그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 그래도 나와는 죽이 잘 맞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둘은 자주 소주잔을 기울였고, 술자리에서 대화는 늘 '정의'로 귀결됐다.

욕먹어도 구부러지지 않고 단단해진 캐릭터

그의 의정활동도 특유의 캐릭터마냥 좌충우돌했다. 행정부인 시청 공무원들 사이에서, 아니 동료의원들(같은 당 의원들마저)도 그와 맞닥뜨리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한마디로 '한번 걸리면 피곤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조소와 욕도 어지간히 들었다.

그래도 구부러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손가락질 해도 옳다고 마음먹은 일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간간이 터지는 유머와 재치, 엉뚱발랄, 오염되지 않은 솔직 담백함에 그를 따르는 마니아층도 형성됐다. 그는 단단해져갔다.

그의 지역구는 전형적인 농촌 시골 마을이다. 저소득층과 고령의 노인 등 사회적 약자가 많은 곳이다. 쏟아지는 민원에도 그는 항상 만면에 웃음과 능청으로 살갑게 다가갔다. 인사성도 바랐다. 그래서인지 그는 4년 뒤 재선에 성공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초선 땐 단둘이던 술자리 멤버가 하나둘 늘어났다. 거기에는 기자도 있었고, 시민운동가도 있었고, 초선 시절 함께한 동료 의원도 있었다. 둘이 여럿이 됐고, 또 '우리'가 됐다. 우리는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번 씩 만났다. 지역 현안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의견, 정보를 공유했다. 단골 메뉴는 약자의 편에 선 '더 나은' 지역사회의 표방이었다. 가벼운 농담을 안주 삼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는 차츰 넓어졌다. 하지만 그는 늘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로 늘 답답하고, 고독해했다.

함부로 애틋했던 마이웨이 10년, 그 끝에 다다르다

다시 4년이 흘렀다. 그는 세 번째 배지를 달았다. 어엿한 중진이 됐어도 그의 날선 비판과 호기로움만은 여전했다. 행정사무감사 때마다 그는 매번 우수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다음은 그가 3선 시의원에 출마했을 때 직접 쓴 출마의 변 중 일부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직업란에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직업 공무원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예상되는 문제를 사전에 감지하고 처리하는 선제적·예방적 행정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적극적인 공무원은 주변으로부터 일거리를 만든다고 손가락질을 당하기 일쑤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으로 너무나 크고 가슴 아픈 대가를 지불했다. 최소한 알량한 교훈이라도 얻어야 할 것 아닌가? 지방의원인 나도 4년 계약직 공무원이다. 이번이 세 번째 출마이지만 이번처럼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는 선거는 없었다. 이러한 부끄러움 속에서 출마하여야 하는가? 과연 내가 적임자인가? 마음 속 깊이 되물어 보게 된다.

얼마 전의 일이다. 우연히 시정 질문 속기록을 살펴보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시정 질문을 마치면서 한 그의 발언이다. 길지만 의미 부여를 위해 그대로 옮긴다.

"지방의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시정질문을 하나 준비하더라도 특별히 옆에 보좌관 한 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위원이나 우리 직원들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PT(프레젠테이션) 넘겨주는 것은 잘하지만, 결정적일 때 안 도와주는, 뭐 좀 예민한 것 좀 하려고 하면, '의원님, 저 여기 잠깐 왔다 가는 건데 이런 것 시키면 저 큰일 납니다'. 이렇게 용기 없는 말을 주저 없이 의회에 할 수 있는 정도의 환경에서 의원님들이 고군분투하고 계신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그렇기 때문에 의원님들이 부족할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침에 딱 나오는데 다른 의원님들이 PT하는 게 좋아 보이고, 나도 좀 해야겠다 싶어서 집사람한테 '이거 좀 빨리 만들어봐' 했더니 난데없이 시켰는데도 만들어주더라고요. 그런데 옆에서 자꾸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저렇게 해야지’ 지청구를 줬어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화가 났을 텐데 아무 소리도 못하고 얼른 가서 해야 된다니까 말없이 해줬습니다. 의회 속기록이 영구보존입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집에서 나오면서 한마디 해야겠다고 작정 했습니다. 오늘 시정질문을 도와주신 우리 집에 있는 송명숙 여사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시정질문을 마치겠습니다." 

전종한 버전 천안시의회, 준비됐나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첫 당선된 전종한 천안시의원.
2016년 6월의 어느 날. 오랜 만에 그를 만났다. 그는 세상 근심을 혼자 다 짊어진 것 마냥 어깨는 축 쳐져 있었고, 몰골은 수척했다. 후반기 시의회 의장 선거에 나선 그는 고민이 깊어 보였다. 그는 내게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내가 답했다. "그동안 의원님께서 보여준 의정활동을 보고 동료 의원들이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잘 했으면 찍어주는 거고, 그렇지 못했다면 안 찍겠죠. 괴로워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은 시간 의원님의 진정성을 동료들께 호소하세요. 진심이 통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위로가 전부였다.

그렇게 마음 졸였던 후반기 의장 선거가 끝났고, 그는 의장이 됐다. 그의 취임 일성은 "약자의 편에 서서 성실"이다. 10년 전, 앞만 보고 돌진하던 촌 동네 시의원이 65만 시민의 대변자인 의회 수장 자리에 올랐다.

지난 18일 취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그는 지난 날 시정질문에서 열변을 토해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갈 것을 밝혔다. 대표적인 약속은 의회 조직의 '변화'다. 의회 사무국을 '잠깐 왔다 가는' 자리로 인식하며 '용기 없는 말을 주저 없이 하는' 환경이 바뀌길 기대한다. 화려한 의전이 뒤따르는 의장 자리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그에겐 어색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가 외롭지도, 고립되지도 않길 바란다. 그는 바로 제7대 후반기 천안시의회 전종한(49)의장이다. 전종한 표 성공의 키워드 '마이웨이', 그 거대하고 담대한 변화가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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