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2> 계룡산은 어디에서 왔을까?

세계 속의 계룡산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걸쳐있는 계룡산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필자는 계룡산을 한반도상의 계룡산이 아니라 지구상의 계룡산으로 놓고 어떤 형상과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수없이 던졌다. 특히 전 세계 실크로드를 유람하면서 세계 속의 한반도와의 관계 규명을 위해 나름대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지금은 나름대로 세계지형상의 계룡산의 지형에 조금은 설명할 수 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계룡산이 한반도 배달민족의 영산(靈山)을 넘어 세계의 산맥이 뭉치고 뭉쳐 동방의 끝으로 온 마지막 종착지라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세계의 지형에 대해 알아보자. 지도를 펼쳐서 중국의 동남부의 끝, 즉 히말라야, 카라코람 산맥을 보자. 온 주변이 짙은 밤색과 보라색으로 가득하다. 밤색은 해발 1000~2000m, 보라색은 해발 3000~5000m의 고산지대다. 세계의 기운이 한 곳에 뭉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히말라야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베레스트(8848m), 칸첸중가(8586m), 다울라기리(8167m), 마나슬루(8163m), 안나푸르나(8091m), 고사인탄(8012m) 등의 고봉(高峯)이 있고 카라코람 산맥에는 K2라 불리는 고드윈오스틴(8611m), 가셔브룸(8068m) 등이 있다. 세계의 가장 높은 산 중 1위에서 8위까지 있으니 다른 산을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겠다.

티벳고원을 품고 있는 히말라야는 중국신화의 발원지인 곤륜산맥(崑崙山脈)을 합해 카라코람산맥를 이룬다. 서쪽으로 힌두쿠시산맥를 만나고 북쪽으로 그 유명한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만나면서 흔히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고원을 형성한다. 아 언제였던가. 지난 날 실로로드를 탐사하면서 중국의 카스에서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로 넘어가는 버스에 몸을 실고 파미르고원을 넘었던 것이. 또 중국의 우루무치에서 천산을 넘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을 지나면서 보았던 그 산맥의 광활함과 황홀함은 지금도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다.

중국대륙의 서쪽 방패 역할을 하는 천산산맥은 중가리아 분지를 만나면서 또다시 북쪽에선 내려온 알타이 산맥과 자연스럽게 교우한다. 이 산맥은 동쪽으로 몽골고원을 지나면서 비교적 완만한 형세를 이루면서 지구상의 동단의 끝 만주의 흥안령(興安嶺)을 만든다.

이 산은 다시 두 갈래 길로 나누어 하나는 중국 내륙으로 뻗은 大흥안령과 다른 하나는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小흥안령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중국의 장백산맥(長白山脈)과 우리 한반도의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이어진다.

아, 나는 우리나라의 명산(名山)인 계룡산이 단순히 백두대간에서 온 지맥을 넘어 히말라야 한 중심부에서 온 동쪽의 끝 영산(靈山)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데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감히 첨언하면 대륙의 기원과 이동에 대해 잠시 살펴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의 대륙은 선캄브리아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뉘는데 앞서 말한 알타이, 천산산맥은 중생대(약 2억 년 전), 히말라야 등 인근 산맥은 신생대(약 6천500만 년 전)에 생긴 산악들이다. 물론 심한 습곡(褶曲)·단층(斷層)운동과 화산활동에 의한 지각변동에 의해서다.)

한반도 속의 계룡산은?  

만주 흥안령을 거쳐 백두산에서 큰 기둥 줄기를 이루며 내려 온 백두대간은 태백산(1567m)을 지나 소백산(1421m), 속리산(1058m), 덕유산(1614m)을 거쳐 대간의 끝인 지리산(1195m)까지 이어진다. 지리산에 못미처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경계에 있는 육십령(六十嶺, 1734m) 아래 쪽 영취산(1076m)에서 줄기 하나가 갈라져 나온다.

영취산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장안리와 대곡리·서하면 금당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지형도 상에는 산명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현지에 가면 정상에 갈색의 팻말이 서 있다. 영취산에서 갈라진 줄기 하나는 서진(西進)하다가 마이산(667m)에서 다시 갈라지면서 한 가닥은 남으로 뻗어내려 호남정맥(湖南正脈)을 이룬다. 다른 하나는 거꾸로 북쪽을 향하여 꿈틀거리며 올라가는데 운장산(1126m)을 지나면서 높이를 한껏 낮춘 후 대둔산(878m), 천호산, 천마산(290m) 등의 산들이 3백 여리를 달려오면서 금남정맥(錦南正脈)을 만든다.

계룡산은 금남정맥이 힘차게 치솟아 오르면서 동서로 날개를 쫙 펴고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와 논산시(論山市)·계룡시(鷄龍市), 그리고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의 일부에 걸쳐 자리한 산이다. 이 산은 호서(湖西)지방에 소재한 산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山으로 일찍부터 한국의 명산 중 하나로 알려져 왔다.

최고봉인 천황봉이 845.1m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산들이 높지 않아 계룡산은 유달리 높아 보인다. 흔히 풍수가들이 말하는 특립(特立)이라는 형세를 하고 있다. 실제로 정상에 올라가서 보면 상당히 멀리까지도 조망이 가능하다.

조선 초 서거정(徐居正)은 계룡산의 산세(山勢)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개 장백산(長白山) 한 줄기가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계림(鷄林)에 이르러 원적산(圓寂山)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 웅진(熊津)을 만나 응축되어 큰 산을 이룬 것이 계룡산(鷄龍山)이다. 물은 용담현(龍潭縣)과 무주현(茂朱縣)에서 발원하여 합쳐져 금산(錦山)으로 흘러들고, 영동(永同)·옥천(沃川)·청주(淸州) 세 고을을 거쳐서 공주에 이르러 금강(錦江)이 되고, 꺾어 사비(泗沘)가 되어 넘실대며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곳이 웅진(熊津)이다. 공주는 계룡산으로 진산(鎭山)을 삼고 웅진으로 금대(襟帶)를 삼았으니, 그 승경(勝景)을 알 만하다.”

계룡산은 ‘명산(名山)’, ‘영산(靈山)’이라 하여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산이다. 고대 이래로 산악신앙(山嶽信仰), 불교문화(佛敎文化)에 덧붙여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도참설(圖讖說)과 같은 내용이 연결되면서 계룡산만의 독특한 특성과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국도(國都)로 책정되어 새로운 도읍지 건설 공사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향후의 미래 세계와 연결 짓는 예언적 부분이 결합되어 세간의 이목(耳目)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태조는 즉위 이듬 해(1393년) 정월 신도후보지로 부각된 계룡산에 행차한 후 도시건설을 위한 기반 공사를 착수하였으나, 연말에 이르러 돌연 중지시켰다. 위대한 계룡산시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계룡산은 다른 많은 산과 달리 풍수 지리적으로 대길지(大吉地)이며 도참설(圖讖說)에 의한 천도(遷都)의 대상지였다. 대표적인 민간비결서 중 하나인 <정감록(鄭鑑錄)>에는 계룡산이 800년 도읍의 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때문에 수도이전이 있을 때마다 계룡산이 후보지로 부각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초 태조 이성계의 신도안 대궐공사와 대원군의 계룡이도설(移都說)이다.

시간이 흘러 계룡산 주변의 변화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신도안에 계룡대가, 주변에 세종시와 국방대가 들어와 있다. 앞으로 계룡산 주변의 변화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단언컨대 조만간 청와대, 국회, 국방부의 간판을 계룡산 주변에서 볼 날이 멀지 않았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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