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 17세기 전설 발견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계룡산 남매탑(男妹塔) 전설. 수필가이자 국문학자인 이상보(李相寶. 1927∼ ) 선생이 쓴 ‘갑사로 가는 길’이란 수필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잘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 전해지고 있는 남매탑 전설은 필자가 발굴한 17세기 전설과 현재의 ‘공주시지(公州市誌)’ 속의 남매탑 전설과는 큰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필자가 수집한 3편의 남매탑에 관한 전설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보의 ‘갑사로 가는 길’(이상보) 속 남매탑 전설
 

정상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一字)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鷄鳴精舍)가 있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 가에서는 남매탑이 눈을 맞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거금(距今) 천사백여 년 전, 신라 선덕 여왕 원년인데, 당승(唐僧) 상원(上原) 대사가 이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하며 수도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 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에만 전심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이 분분하여 사방을 분간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가 버렸다. 대사는 정성을 다하여, 기절한 처녀를 회생시키니, 바로 경상도 상주읍에 사는 김화공(金和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한 도덕과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연모의 정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는가? 김 화공도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해 준 상원 스님이 생명의 은인이므로,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이요, 상주(尙州)에도 이와 똑같은 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공주시지(公州市誌)’ 속 남매탑 전설

옛날 백제가 망한 후 왕족이 이곳에 와서 토굴을 만들고 수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호랑이에게 자기를 해치러 온 것이냐고 물으니 호랑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입만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움을 무릅쓰고 호랑이 입 속을 살펴본즉, 뼈가 입 속에 가로질러 있었다.

그가 호랑이 입에서 뼈를 빼줬더니 고맙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며칠이 지난 후 눈이 펑펑 내리는 밤 호랑이 소리가 나기에 나가보니 젊은 여자 한 사람을 내려놓고 달아났다. 그 여자를 방에 끌어들인 후 사연을 물어본 즉 “저는 시집을 가게 되어 혼사를 치르고 남편과 신방에서 자다가 잠깐 밖에 나왔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날부터 토굴에서 함께 한 이들은 봄이 오자, 여자를 고향에 돌려보내니 부모들이 “내 딸은 어떤 인연이든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것을 구해주었으니 그대가 데리고 살라”고 했다. 계룡산으로 함께 온 그들은 머리를 깎고 훌륭한 스님으로 이름을 떨치다 노승이 되어 죽었다. 이런 소문이 나자 두 스님의 높은 뜻을 살리기 위해 신도들이 석탑을 쌓았다. 두 사람의 거룩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빛내기 위해 세워진 오뉘탑은 이러한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계룡산을 지키고 있다.

오재정의 ‘유계룡산록’ 속 남매탑 전설

필자가 발굴한 자료인 오재정(吳再挺)의 <유계룡산록(遊鷄龍山錄)>에는 남매탑과 관련한 전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살펴보면 위의 두 전설과는 다른 점이 많아 관심을 끈다.

옛 암자에는 사람이 거처하지 않고 석불(石佛)만 놓여 있었다. 앞의 대에 있는 두 석탑은 7층 석탑이 앞에 있고, 9층 석탑이 뒤에 있다. 승려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도승(道僧)이 암자에 거처할 때 호랑이 목에 뼈가 걸린 것을 보고 뽑아 제거해 주었더니, 호랑이가 은혜를 갚고자 소녀를 업어다 주었다.

도승이 소녀를 거두어 살려주고는 사는 곳을 물으니, 경주(慶州)의 어느 민가(民家)의 딸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그녀의 집에 돌아가니, 부모가 매우 기뻐하면서 가산(家産)을 내어 이 탑을 조성하였다. 9층탑은 승려를 상징하고, 7층탑은 소녀를 상징한다고 한다. 황당한 말이 어찌 오래도록 전해왔단 말인가? 참으로 한번 웃어넘길 만하였다.

“舊居無人, 只有石佛. 前臺二石塔, 七層居前, 九層居後.  僧言昔有道僧居在此菴, 見虎口硬骨, 拔而去之, 虎欲報恩, 負少艾遺之. 其僧受而活之, 問其居止, 則慶州人家女. 率而歸之, 其父母大喜, 出家財造此塔. 九層者僧也, 七層者女也云. 荒誕之說. 何傳之久也.”)

위 남매탑에 대한 3편의 전설을 분석해보면 아래와 같다.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➊ 석탑의 규모(종류)는, 이상보의 글에는 언급이 없고 공주시지에는 5층과 7층으로 된데 반해, 오재정의 기록에는 7층과 9층으로 되어있다. ➋ 소녀의 고향은, 오재정의 유기엔 경주(慶州)로 되어 있는 반면 나머지는 상주(尙州)로 되어 있다. ➌ 전설의 핵심(核心)이라 할 수 있는 탑 조성 기여자에 대해 이상보는 소녀의 부모(金和公), 오재정은 소녀의 부모(가산)인데 반해 공주시지에는 훌륭한 스님과 신도들의 공양(供養)으로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➍ 남매탑(오뉘탑) 개념 역시 오재정의 작품에는 소녀가 스님이 되지 않고 다만 후에 7층 석탑→스님으로, 9층 석탑→소녀로 묘사(描寫)되고 있으나, 공주시지에는 소녀가 스님이 되어 남녀 스님이 죽은 후에 합쳐(5층 석탑, 7층 석탑) 오뉘탑으로, 이상보는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불리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는 등 세 편의 전설이 조금씩 다른 내용을 하고 있다.

남매탑 전설 체계적인 정리 시급

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남매탑 전설은 처음 생성(生成)되었다가 시대와 주변여건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매탑에 대한 전설을 더 수집해 체계적인 정리가 요망된다.

한편 남매탑은 지금은 ‘청량사(淸凉寺)’라고 바꾸어 불리는데 이는 탑의 앞터에서 거북모양의 주초석(柱礎石) 20여 기(基)가 수습되고, 탑의 옆에서 3점의 석재(石材)와 ‘청량사’란 명문(銘文)이 새겨진 와편(瓦片)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남매탑은 고려후기 탑 조성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7층 석탑은 백제계 석탑양식과 신라계 석탑양식이 섞여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1998년 8월 1일부로 남매탑을 보물로 지정했다.

*위와 다른 남매탑 전설을 채록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010-7409-6652)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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