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100>

회갑이 넘은 정 모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생계가 어려워져 학업을 포기하고 5남매의 생계를 책임졌다. 13년 전 받은 뇌수술로 정 씨는 신체의 반 이상이 마비돼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지만 평생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등교해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교실을 가까스로 걸어 올라가 공부했다.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견딘 그는 지난 2월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59세 이 모 씨는 뒤늦게 시작한 고등학교 졸업 1년을 앞두고 암 진단을 받았다. 깊은 절망과 항암 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하루 1시간이라도 학교에 가 꿈에 그리던 고교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일반고를 다니다 소위 '왕따'로 학교를 그만둔 19살 김 모 군은 할아버지·할머니뻘 되는 어르신 학우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열심히 공부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만학도 꿈의 산실 예지중·고 학내 갈등으로 수업거부 사태

지난 2월 대전예지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난한 시절 먹고 살기 힘들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 성성한 백발로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던 것은 예지중·고 같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개교한 예지중·고는 지금까지 37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올 2월에도 중학교 118명, 고등학교 153명이 졸업해 이중 92명이 대학에 진학했다.

늙음도, 장애도, 병마도, 사회의 부정적 시선도 배움을 향한 이들의 열망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개근상을 받겠다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석 한 번 안하는 60~70대 어르신들이 지난주부터 수업을 거부한 채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를 하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학생이 있는가 하면 오늘은 학교를 정상화 시켜달라며 삭발까지 한다. 학생의 대다수가 노년층인데 3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거리시위까지 나선다니 걱정스럽다.

늦게 시작한 공부 재미에 푹 빠져있던 만학도들이 학교 밖 시위까지 강행한 것은 예지중·고를 시급히 정상화시켜 달라는 요구 때문이다. 지난 2월 이 학교 이사장 겸 교장의 '갑질' 논란이 터진 뒤 예지재단과 학생들 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고 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예지바로세우기정상화추진위원회는 검찰에 진정서를 접수했으며 설동호 교육감에 대한 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대전시교육청은 이사진 교체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가 싶더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교육청은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예지중·고 정상화 해법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 한 번 연 대전시의회도 후속 조치를 찾지 못한 채 뒷짐만 지고 있는 꼴이다. 사태가 점차 악화되는 가운데 교육청의 무책임한 행정과 시의회에 수수방관의 책임이 돌아가고 있다.

연간 5억~7억 지원하는 예지중·고 문제 설 교육감이 적극 해결해야

예지중·고 갈등은 비정상적인 학교운영을 보다 못한 학생들의 집단민원으로 시작됐는데 '갑질' 논란을 빚은 이사장 겸 교장이었던 박 모 씨가 '자기성장비' 명목으로 교사들의 월급 중 10% 정도를 자신에게 바치게 하고 차용형식으로 교사들에게 수천만 원씩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예지재단을 특별감사한 교육청은 박 씨에 대한 해임과 관련자 13명을 징계 요구했으나 학생들은 비리 이사진의 전원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청은 예지중·고가 평생교육법의 적용을 받는 곳이어서 교육청이 관리 감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연간 5억~7억 원 가량의 교육예산을 지원하고 있으니 방관할 일이 아니다. 500여명의 중장년 학생들이 흰 마스크에 검정색으로 'X표'를 그린 채 수업을 거부한 대전교육 역사상 초유의 일은 어린 학생들에게 미칠 파장 또한 적지 않다. 대전교육청과 설동호 교육감은 더 이상 지켜만 봐선 안 될 것 같다.

예지재단 스스로 사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 난 만큼 더 늦기 전에 교육감이 적극 나서 연간 수억 원씩 들어가는 대전 교육예산과 늦깎이 학생들을 지켜야 한다. 교육청이 법으로 강제할 수 없다면 보조금 지급 중단 같은 강수를 동원해서라도 예지중·고 문제에 적극성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사태 해결에 소극적이니 예지재단과 대전교육청, 설 교육감에 대한 유착의혹이 나오는 것이다.

예지중·고는 정규교육 기회를 놓친 성인과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이다. 교육청이 직접 책임지는 유치원, 초·중·고생은 아니지만 또 다른 학교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교육청뿐 아니라 시의회도 사태 해결에 훨씬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때다. 누구보다도 설 교육감이 앞장서 예지중·고 만학도들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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