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희의 미디어창] <98>

지난 주 전·현직 대학총장들이 한국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가졌다. 전·현직 총장 모임인 한국대학총장협회는 지금 우리 사회가 국가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시급한 대책마련과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라는 자성과 촉구도 이어졌다.

이현청 전 호남대 총장은 주제발표를 통해 "우리나라의 학교는 '입시인간'이라는 인간 상품의 생산 장소"라며 "대학 입학까지의 삶은 한 가지 목적과 한 형태의 '강압적 정형화' 유형을 탈피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우리 교육이 비정상적으로 과열된 원인은 부모가 자식을 통해 대리보상을 받으려는 강한 '한풀이 교육구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자식 통해 교육적 소원 성취하려는 부모 '한풀이 교육' 고착화

자신의 교육적 소원을 자식을 통해 대신 성취하려는 부모들의 욕심이 한풀이 교육구조를 고착화 시켰으며 이런 구조가 입시지옥을 만들었다. 중·고등학교는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에 치중해 대학 진학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은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학교나 교사도 이들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좌절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말로는 창의성을 갖춘 인재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라면서 실제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시지옥을 빠져나온 학생들을 대학이라는 또 다른 직업훈련소로 몰아넣는 게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됐다. 초·중·고생들은 입시위주 교육에 시달리고 대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몰두하며 학부모들은 교육비 부담으로 허리가 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정부가 구조개혁이라는 칼을 빼든 뒤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 아닌 직업훈련소로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일자리 자체가 늘지 않는 현실은 외면한 채 대학교육이 잘못돼 청년실업률이 높아진다고 판단해 대학 정원을 줄이고 문과를 이과로 바꾸라는 압력을 가한다. 취업률 증대를 위해 공대 정원을 늘린다면 대학 부설 직업훈련원을 많이 만드는 게 더 빠른 방법이다.

대학은 특정기업의 인력을 양성해 주는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인재를 키우려면 기업은 대학이나 직업훈련소를 직접 운영하면 될 일이다. 오늘 배운 지식이 내일가면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초스피드 시대에 당장 필요한 기술을 대학이 가르치기를 요구하는 것은 맞지 않다. 기업이 필요로 하지 않는 교과목이나 학과를 폐지하거나 통합하는 것 역시 학문의 다양성을 훼손하는 행위다.

대학은 기성품 만드는 곳이 아니라 원자재 공급하는 곳

대학은 금방 사다 쓰는 기성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원자재를 공급하는 곳이다. 세계 어떤 일류대학도 기초학문은 걷어찬 채 기술교육에 치중해 성공을 거뒀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일정부분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식을 창출하는 대학공간을 직업훈련소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국가 백년대계를 짊어진 교육이 바로 서야 그 바탕 위에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 오락가락 입시정책과 교육정책의 1차 피해자는 학생들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대학과 학과의 존립을 취업률로 판단하는 정책이 유지되는 한 학문의 다양성과 자율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전·현직 대학총장들이 걱정한 '국가 기틀이 흔들릴 정도의 심각한 위기'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경제의 불확실성은 점차 확대되고 정치권의 신뢰는 추락했으며 사회질서 또한 붕괴돼 계층 간 갈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우리 교육이 고질적 병폐를 해소하고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개편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기초학문 붕괴와 대학의 직업훈련소 전락, 더 이상 두고 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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