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한 작은 학원의 한자교육 실험 결과

대전에 초·중학교 과목을 가르치는 A학원이 있다. 한자 학원은 아니다. 학원 전체 수강생이 100명이 좀 안 된다. 이 학원은 보통 학원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종합반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한자 수업을 받아야 한다. 한자를 배운 적도 없는 학생인데 한자를 배우지 않겠다고 하면 되돌려 보낸다. 그래도 이 학원에 들어오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한자 교육 의무화’로 학교 성적 올리는 학원

얼마 전 지인에게 이 학원에 대한 얘기를 듣고, 학원 원장에게 한자 수강을 의무로 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답은 간단했다. 한자를 함께 가르쳐야 일반 과목 성적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 영 수는 물론 음악 미술조차 한자의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명암(明暗)’ ‘도형(圖形)’ ‘원근법(遠近法)’ 같은 단어는 한자를 모르는 학생들에겐 외워야 할 기호에 가깝지만 한자를 배운 학생들에겐 암기가 아니라 이해만 하면 됩니다. 잠실(蠶室)이나 대전(大田)은 한자를 모르면 암기해야 할 기호에 불과하지만 ‘누에’나 ‘큰 밭’과 관련 된 지명이라는 걸 알면 외울 필요가 없겠지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나오는 단어나 개념은 한자를 배우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학생이 성적을 올리려면 반드시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게 학원 원장의 확신이다. 그는 운동선수를 하면서 전교 꼴찌 수준의 학생을 10위권까지 끌어올린 것을 포함해서 ‘한자 교육’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들려줬다.

A학원이 이런 식으로 가르친 건 채 2년이 안 된다. 원장은 원래 수학 강사였다. 한문은 나중에 배웠다.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한자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자가 아이들 교육에도 효과가 있는 것을 알면서 ‘한자 의무제’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시험 과목에도 없는 한자를 왜 꼭 배워야 하느냐’며 발길을 돌리는 학부모도 있지만 다시 찾아와 자녀를 부탁한다고 했다.

시민단체 “한문 과목 성취도 가장 낮아” 조기교육 반대

A학원의 ‘성공기’를 듣고 다른 학원 한 곳이 같은 방식으로 해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자 조기 교육에 반대하는 한 단체가 밝힌 ‘학교알리미’ 내용에 따르면 2014년 서울 강남지역 3개 중학교의 한문 성취도는 여러 과목 중에 가장 낮았다. 한문은 중학교에서 가르쳐도 별 효과가 없는데 조기교육 효과는 더 의문시된다는 뜻이다.

A학원의 성공이 특수한 경우인지 아니면 일반화가 가능한 교육 모델이 될지는 확신하긴 어렵다. 다만 내 주변에선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쳐 적지 않은 효과를 봤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어르신은 “우리 손자가 서울대에 합격한 건 순전히 어려서부터 한자를 가르친 덕”이라고 확신했다.

한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사교육 부담 등의 문제를 들어 소극적인 사람들도 많다. 한자 교육의 필요성엔 동의하면서도 교육 시기를 너무 앞당길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처럼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 가르쳐도 늦지 않은데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가르쳐 공부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 실험 “영세아는 한자 쉽게 이해”

하지만 일본에서의 실험은 그렇지 않았다. 취학 전 아동에게 아홉 九(구), 새 鳥(조), 비둘기 鳩(구) 3글자를 가르친 뒤 다음날 읽어보도록 했더니 鳩→鳥→九 순으로 대답했다. 예상과 달랐다. 복잡한 비둘기 鳩 자를 먼저 익힌 것은 비둘기는 눈에 보이고 아홉은 눈으론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九→鳥→鳩 순으로 배우는 학교교육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한자 조기 교육을 강조했던 이시이 이사오씨가 쓴 ‘한자가 내 아이를 천재로 만든다’(키출판사 번역)는 책에 소개한 내용이다. 그는 “영세아는 말보다 한자를 쉽게 이해할 뿐 아니라 빨리 배운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일본에는 700여개의 유치원에서 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일본 내의 한자 거부 운동도 소개돼 있다. “2차대전 패전 후 일본에는 한자를 버리고 로마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강했다. 구미 여러 나라가 강성한 것은 로마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며 로마자 사용을 주장하는 국제주의자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세계의 문자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표기법이 사실은 ‘한자-가나 혼용문’”이다. 이는 1960년 대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예상한 바이고, 그 후 30년이 지나 MIT의 실험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글과 가나는 여러 면에서 같지 않기 때문에 주장의 신빙성이 검증될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2가지 점에서 우리도 한자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녀, 지도자로 키우려 한자 가르친다는 부유층

첫째,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글로 쓰는 데 효과적이다. 복잡한 개념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어 ‘순망치한’ ‘과유불급’ ‘읍참마속’ ‘새옹지마’ 같은 사자성어는 제법 긴 설명이 필요한 개념을 4자로 표현한다. 한자에는 사자성어가 아니라도 이런 식의 단어들이 많다. 영어와 한글에도 격언 속담 신화 등이 있어서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지만 표의문자인 한자를 따라 갈 수는 없다.

같은 조건이라면 한자까지 배운 학생의 사고력을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한글만 배워도 ‘읍참마속’의 개념을 배울 수는 있으나 보다 복잡하게 표현해야 한다. 더하기 빼기만 배운 사람과 함수까지 배운 사람과는 수학 능력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둘째, 한자는 지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용한 수단이다. 한자에서 좀 더 나아가면 논어 맹자다. 이런 경서들은 기본적으로 리더가 되는 데 필요한 덕과 지식을 쌓도록 요구한다. 단순한 ‘바른 생활책’ 이상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윤리 도덕만으로 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부유층 가운데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자녀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쪽 분야를 잘 아는 한 분은 “부자 집 중에는 자식을 지도자로 키우려고 한자 교육을 시키는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한자를 배운 학생과 안 배운 학생 사이엔 단순히 안중근 ‘의사(義士)’와 병원의 ‘의사(醫師)’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글과 한자는 용도 다를 뿐

법이 개정되든 안 되든 부유층들은 한자의 유용성을 알고 일찍부터 과외를 시킨다. 한자를 못 배우는 학생들은 대개 못 사는 집 아이들이다. 사교육 부담 가중이 걱정이긴 하나, 한자 공교육이 늦어지면 늦어지는 만큼 잘 사는 집 아이들만 더 일찍 ‘또 하나의 경쟁력’을 키우는 결과가 된다. 그게 문제다.

아직도 한자 사용과 한자 교육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글로도 충분한데 굳이 남의 나라 문자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판단도 있을 것이다. 또 ‘한글’이 걱정돼서 한자에 대해 경계감을 갖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유용한 다른 것’이 있으면 함께 써야 한다. 한자가 한글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다. 한자는 ‘말글(언어)’로는 한글을 따라올 수 없다. 한글과 한자는 용도가 다를 뿐이다. 한자는 중국 문자지만 중국만의 것은 아니다. 동양문화권이 함께 써온 문자다.

또 하나의 ‘계급의 벽’ 한자(漢字)

이제 영어는 안 배우면 안 되는 외국어다. 사교육 문제를 이유로 포기할 수도 없다. 좋아서 배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영어의 필요성 때문이다. 한자의 ‘숨겨진 힘’을 안다면 역시 배움을 거부하기 힘들다. 고대 시대 문자는 권력층만의 전유물이었다. 권력층은 그것으로 권력을 얻고 유지했다.

우리는 세종대왕께서 그런 문제를 많이 해결해주셨다. 그러나 한자는 아직도 배우는 자와 못 배우는 자 사이에 ‘계급의 벽’을 쳐놓고 있다. 한자 교육을 저지하거나 미루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국가가 나서 허물어야 한다. 한자 교육 논란이 헌법재판소까지 가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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