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이 만난 사람] <24>선병원 설립자 부인 김인

1966년 1월. 서울도 그랬지만, 지방의 의료실정은 전문의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낙후된 시대였다. 그 때 그 시절,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 대전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그런 그가 중구 선화동에 전문의가 진료하는 대전 최초의 정형외과를 개원했다. ‘선 정형외과’다. 현재 8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 120개의 진료대를 갖춘 매머드 치과병원, 두 곳의 건강검진센터를 운영하는 대형 병원그룹으로 발전한 선병원의 모태다.

선병원이 올해로 개원 50주년을 맞이했다. <디트뉴스>는 대전 의료의 주춧돌을 놓고 의술을 넘어 인술(仁術)을 실천하다 2004년 타계한 소재(昭齋) 선호영(宣鎬榮) 박사를 기리는 특별 인터뷰를 마련했다. 대전에서 기자로 먹고 살면서 그의 일생에 헌사 정도는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다. 주제는 ‘50년의 사랑’으로 정했다. 선 박사의 환자 사랑 50년과 선 박사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인 김인(金仁‧85) 여사의 50년 사랑을 모두 담겠다는 게 기획의도다. 김 여사를 선화동 자택에서 만났다.

전쟁 통에도 사랑은 싹 튼다

고(故) 선호영 박사는 1925년 경북 김천에서 작은 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의 7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의대를 나와 외과에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경남 마산으로 피난을 가 공군에 입대했다. 김 여사를 만난 건 대위 때였다.

김 여사는 193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열여덟 살 때 전쟁이 나자 마산으로 피난했다. “폭격이 있던 날 하수구에 밤새 숨어 있다가 날이 새 기어 나왔더니 사람들이 ‘예쁜 아이가 여기 있었네’ 하고 수군대던 기억이 납니다.”

전쟁 통에도 사랑은 싹텄다. “나는 유능한 피아니스트의 피아노가 되고 싶어요.” 로맨스 영화의 대사가 아니다.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당시 공군병원장이던 고 박병래 전 성모병원장이 둘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선 박사는 대뜸 ‘당신은 어떻게 살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김 여사의 답이었다.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뜻을 알아차린 선 박사는 감동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누구보다도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겠소.” 선 박사의 김 여사를 향한 프러포즈였다. 김 여사는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는 남편과 저,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항상 밑거름이 됐던 약속”이라고 했다.

둘은 연애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선진의료에 대한 갈증…셋째 낳자마자 독일로

가진 것 없이 시작한 살림살이는 퍽퍽했다. 선 박사의 큰 형님이 아들 공부시킨다고 안암동에 집을 얻었는데 거기서 얹혀살았다. 큰 아들(석훈, 의사)을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은 미국으로 떠났다. 공군에서 미국 선진의료를 배우라고 보내줬던 것. 선 박사는 큰 아들을 낳고 9개월 만에 돌아왔다. 노량진에 셋집 하나를 얻고 둘째(두훈, 선병원 이사장), 셋째(승훈, 선병원 의료원장)를 낳았다. 시어머니는 넷째 아들인 선 박사를 유독 좋아해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도 김 여사의 몫이었다.

선 박사는 소령으로 근무하던 중 전역했다. 독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셋째를 낳고 10여일 후에 홀연히 독일로 떠났다. “성공할 때까지 마산 친정에 의탁하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김 여사는 4년이나 아들 셋을 데리고 친정에서 살았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남편이 저와 자식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어요.” 선 박사가 선진의료에 대해 얼마나 큰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선 박사는 4년 만에 하이델베르크 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김 여사는 아들 셋을 데리고 김포공항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선 박사는 아내가 보이자 뛰어와서는 자식들을 하나씩 안아줬다. 마음이 격해졌는지 “이 아이들이 내 자식들이냐”고 묻고 또 물었다. 아버지 얼굴을 처음 본 셋째 승훈은 바지가락을 붙잡고 “아저씨, 아저씨”하고 불렀다.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파독광부 산재보험 적용받게 한 주역

선 박사가 유학하던 하이델베르크 인근에 보쿰 광산이 있었다. 정형외과 의사인 그는 광산에서 실려 온 환자들을 끊임없이 봐야 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에서는 수술 잘 하는 ‘닥터 순(Sun)’으로 유명했다. 밤낮없이 수술을 했다. 머리, 척추, 허리 안 다룬 수술이 없었다.

어느 날은 기다란 빵을 베개 삼아 자다가 새벽 4시에 호출을 받았다. 그는 머리에 베고 있던 빵을 자르려다 손을 크게 다쳤다. 빵 한 조각 먹고 수술실로 가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환자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파독광부들의 딱한 사정을 해결해 준 이도 그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산재(産災) 처리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독일정부에 항의했다. 독일정부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파독광부들이 최고 등급의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해줬다.

세계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독일에서 선진의학을 배우고 돌아온 그는 가톨릭의대 정형외과 교수로 부임했다. 가톨릭의대에선 지금도 성모병원을 일으킨 주역으로 선 박사와 고 안용팔 교수(재활의학), 조규상 교수(예방의학)를 꼽는다. 남편이 가톨릭의대 교수가 되면서부터는 가족이 부평 사택에서 살았다. 넷째(경훈, 선치과병원 병원장)가 태어난 게 이 때다.

적십자병원장으로 대전과 인연

대전과의 인연은 7~10대 대한적십자 총재를 지낸 고 최두선 전 경성방직 회장(전 동아일보 사장, 전 한독협회 회장)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최 총재가 독일에 왔다가 통역할 사람을 찾자 하이델베르크대 총장이 ‘닥터 순’을 소개한 것.

최 총재는 1963년 12월 대전적십자병원을 세우고는 선 박사에게 1년만 병원장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선씨 집안은 대전이란 낯선 도시에 정착했다. 대전적십자병원은 베드가 20개뿐이었다. 대전에 정형외과가 없어 모여드는 환자를 인근 여관을 빌려 병실로 이용할 정도였다.

약속한 1년이 지나자 그는 가톨릭의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시민들이 대전에 정형외과가 없는데 서울로 돌아가면 환자는 어떻게 하느냐며 막아섰다. 선 박사는 고민 끝에 대전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는 적십자병원에 남아 환자를 돌보다 아예 정형외과를 개원하기에 이른다. 1966년 1월 중구 선화동, 지금의 소청1번가 자리에 문을 연 선정형외과다.

큰 형님에게서 빌린 50만원으로 50평짜리 땅을 사 지은 4층 건물이었다. 건축비는 은행과 대부업자에게서 구했다. 손가락 잘려온 은행장, 사냥 갔다 다쳐온 사채업자 등 선 박사에게 수술을 받았던 이들이 선뜻 돈을 빌려줬다. 20병상 규모의 대전 정형외과 1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선 박사는 딸 노래를 불렀다. 큰 기대를 갖고 병원 개원 1년여 전 다섯째(형훈, 바이올리니스트, 선병원 문화이사)를 낳았다. 그제 서야 그는 ‘내가 딸 복이 없다’며 포기했다.

프로 중의 프로 ‘최고의 정형외과 전문의’

막내를 등에 업고 병원 준공식을 했는데, 벌써부터 환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 여사가 손님을 접대하는 중에도 옆방에선 수술이 시작됐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여름이면 선 박사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수술을 했다. 김 여사는 얼음을 수술실 바닥에 뿌려줬고, 선 박사는 발을 얼음에 비벼가며 땀을 식혔다.

선 박사는 독일에서 의술을 배운 터라 소독 하나는 철저했다. 당시만 해도 감염에 대한 개념이 미약했을 때였다. 대개 손을 수돗물에 두어 번 씻는 정도였는데, 그는 소독약으로 다섯 번씩 씻어내고 수술을 했다. 그가 환자에 대해 얼마나 철두철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술 장비도 다 독일에서 들여왔다. 오죽했으면 서울대 의대 동기생인 오동열 박사(전 오내과 원장, 오재건  美메이요 클리닉 순화기내과 교수 겸 삼성서울병원 심장뇌혈관병원 병원장의 부친)가 “배포 한 번 크다”고 말했을까. 국산 기술력이 부족하던 때였다.

의사로서 선 박사는 프로 중의 프로였다. 어느 날 차에 치여 다리가 심하게 다친 환자가 찾아왔다. 가는 병원마다 다리를 절단하라고 했다. 그가 소문을 듣고 선 박사에게 왔다. 선 박사는 “왜 멀쩡한 다리를 자르느냐. 내가 못 고치면 독일이라도 데려가서 치료해주겠다”며 수술을 해줬다.

어떤 목사의 아기가 뇌를 다쳐서 온 적도 있었다. 얼마 살지 못한다고들 했다. 한 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던 아기는 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살았다. 새 생명을 얻은 환자는 이후로도 설날만 되면 선 박사에게 세배를 하러 왔다.

의술 넘어 仁術 실천한 ‘참 의사’

선 박사는 의술만 최고가 아니었다. 그는 의술을 넘어 환자를 가족만큼 사랑한 ‘참의사’였다.
 
하루는 소록도 신부님이 4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대전까지 찾아왔다. 뇌에 종양이 생겼는데 종합병원에서 돈이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선 박사는 그 아이를 살려냈다. 물론 치료비는 받지 않았다. 그 아이는 성장해서 이름만대면 알만한 유명인사가 됐다.

한참 시간이 흘러 2000년쯤이었다. ‘소록도 신부님’이 은퇴 후 선화동성당에 강연을 하러 왔다. 신부님은 미사 도중 그 때 일을 회고했다. “우리 성당에 나오시는 베드로가 주인공입니다.” 선 박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없는 사람인양 했다. 하지만 신부는 그를 알아챘다. 신부는 선 박사에게 다가와 포옹하고 눈물을 흘렸다. 김 여사는 “수술실에서는 거침없었지만 자신을 내세우기는 무척 싫어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진폐증(폐에 분진이 침착하여 이에 대해 조직 반응이 일어난 상태) 환자는 무조건 무료로 치료해줬다. 김 여사가 “왜 진료비를 안 받느냐”고 물었더니 선 박사는 “저 분들한테 받을 게 뭐가 있느냐”고 했다. 독일에서 경험한 광부들의 딱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 박사는 매년 낙후된 지역을 찾아 의료 봉사활동을 펼쳤다. 직접 진료한 무의촌 환자만 2만 명이 넘는다. 700명이 넘는 무의탁노인에게 무료 척추관절 수술도 해줬다. 병원비를 못 내고 도망간 환자의 집을 찾아가서는 오히려 쌀을 사준 적도 있다.

위기를 기회로, 선병원 설립

선정형외과 바로 옆에 시민관이란 극장이 있었다. 극장을 헐고 백화점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다. 땅을 파면서 병원 건물에 금이 갔다. 다툼이 싫어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다툼이 계속됐다면 백화점 공사가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근에 허름한 작은 건물을 임시로 얻어 환자를 돌보다가 새 병원을 지었다. 중구 목동의 대전선병원이다. 1982년 7월이었다.

가톨릭의대 출신들이 선 박사에게 몰려들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의사들이 하나 둘 선 박사와 함께 했다. 준 종합병원의 틀이 갖춰졌다. 김 여사는 “남편은 서울대를 나왔지만 가톨릭의대에서 열심히 가르쳐서인지 그 대학 출신들을 많이 썼다”고 했다. 곽승수 전 원장(유성선병원 외과)이 대표적 케이스다.

병원 규모는 점점 커졌지만 선 박사는 병원과 환자밖에 몰랐다. 여행은 사치에 불과했다. 젊었을 때부터 온 가족이 함께 가는 바캉스는 꿈도 못 꿨다. 김 여사는 일반 가정의 소소한 행복을 자식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김 여사가 오형제를 데리고 시외버스 타고 대천해수욕장에 다녀와야 했던 이유다.

남다른 인류애는 그에게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음식물쓰레기를 없애기도 하고 사료나 비료로 바꾸기도 하는 ‘하이나(Hina)’ 개발에 몰두했다. 하이나를 활용해 돼지와 닭을 키웠다. 질병예방과 가축의 성장 촉진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무농약 무공해 연구를 위해 고추 같은 작물을 키우기도 했다. 김 여사는 “세상을 구하기라도 할 것처럼 쉼 없이 사시더니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과 사돈 된 사연

선 박사의 차남 선두훈 이사장의 부인이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장녀(정성이 이노션 고문)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전의 정형외과 전문의가 어떻게 한국 최고 재벌가와 사돈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김 여사의 어릴 적 친구가 고 정주영 회장의 이웃집에 살았다. 왕래가 잦던 그 친구는 자연스럽게 선두훈 이사장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왔다. 정략결혼에 관심이 없는 고 정 회장과 선 박사의 인품을 누구보다 잘 알던 그 친구가 중매를 섰다. 선 이사장은 자신과 마주 앉은 처녀가 ‘왕회장’의 손녀딸이란 걸 알지 못했다.

선 이사장은 정 고문의 수수한 매력에 반했던 것 같다. 정 고문도 의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수더분한 선 이사장이 마음에 들었다. 김 여사는 “오랫동안 며느리를 겪었지만 재벌가 딸이란 걸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겸손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고도 했다.

둘의 약혼식은 정주영 회장의 자택에서 치렀다. 정 회장은 선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관상쟁이가 다 됐는데 선 군은 의사가 아닌 뭘 해도 성공할 아이입니다.”

서예가 남편, 화가 아내

고 선 박사는 서예에도 능했다. 추사체(秋史體)의 연구회원으로서 많은 명필을 남겼다.

육십이 넘어 숨어있던 재주에 심취했다. 열정적으로 의술을 펼쳤던 것처럼 서예에도 몰입했다. 틈틈이 글을 쓰며 무아지경의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김 여사는 “프로정신이 강했던 만큼 글씨를 쓸 때도 그 안에 푹 빠져 있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서예작품에 남편의 성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했다.

김 여사는 화가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3회 특선 및 입선했고, 대전미술대전 한국화부분 최우수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선 박사는 아내에게 ‘인산(仁山)’이란 호를 지어줬다. 글자 그대로 ‘어진 성품이 산같이 쌓였다’는 의미다.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묵묵히 내조하는 아내를 ‘어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한 번씩 붓질을 더해 색을 입힌 그림이 사임당을 닮았다.

김 여사는 “남편 내조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여념이 없이 지내다 안주할 시기라고 할 뒤늦은 나이에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며 “어린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뒤늦게 이루게 됐다”고 했다. 선 박사는 “이러다가 화가 남편이 되는 것 아니야”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선 박사 타계 후 2007년 3월 서울과 대전에서 남편의 서예작품과 아내의 그림을 모아 사모전(思慕展)을 열기도 했다.

"후회 없는 삶",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고 선호영 박사는 병환이 깊어지자 의연하게 투병했다. 병세가 악화돼서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김 인 여사가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후회 없이 살았지요? 아이들도 잘 자라줬고, 우리 행복했지요?” “그래, 그래, 응 그랬지. 고맙고 감사해요.” 선 박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일주일 후 선종했다.

현재 선병원은 둘째 선두훈 이사장(59‧코렌텍 대표이사), 셋째 선승훈 의료원장(57‧스웨덴 명예영사), 넷째 선경훈 치과병원장(53‧루마니아 명예영사) 등 삼형제가 경영하는 병원으로 유명하다. 막내 선형훈(51‧바이올리니스트)은 이작 펄만, 핑커스 주커만, 정경화, 강동석 등을 배출한 고(故) 이반 갈라미안의 마지막 제자로, 음악을 통해 환자 치유를 돕는 문화이사로 활동 중이다.

목동 대전선병원에 들어서면 처음 눈에 띄는 게 선 박사의 흉상이다. 그 아래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제약 없이 최선의 의료를 제공한다.” 이는 그대로 선병원의 경영철학이 됐다. 올해가 선병원 개원 5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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