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국열의 밥그릇챙기기] 평생밥벌이학교 교장

# 반석동에 살고 있는 김 교감의 아파트 현관 앞에는 오늘도 신문이 쌓여 있다. 주말에는 특히 그랬다. 모바일 시대라고는 하지만 지방 신문을 포함해 경제지와 중앙 일간지를 합쳐서 3개 신문을 구독하는 모양이다. 승강기를 타려고 하면 문 앞에 수북이 겹쳐 있는 신문들을 종종 발견한다. 며칠 전, 그동안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승강기를 탔는데 우연히 김 교감을 만났다. 이웃집에서 수년째 살고 있지만 자주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요즘 들어서 모습이 통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며 한참 동생뻘인 나의 질문에 대뜸 ‘바티칸’을 다녀왔다며 살짝 웃는다. 평소에 느낀 생각이었지만 김 교감의 ‘살인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곤 한다. ‘그래서 신문이 쌓여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살짝 뇌리를 스쳤다.

늘 다람쥐 쳇바퀴 돌면서 허우적대며 심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한편으론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배우자 역시 초등학교에서 평교사로 명예퇴직한 뒤 얼마 안 되서 김 교감도 정든 학교를 나와야만 했다. 주중에는 부부가 함께 자전거로 세종시와 금강주변까지 왕복코스를 다녀오는 모습을 가끔 목격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배우자의 건강을 위해서 부부가 함께 매일 아침 인근 우산봉 산행은 기본이었다. 오후 시간에는 김 교감은 틈틈이 골프 연습장에 다니고 있었다. 특히, 날씨 좋은 주말에는 특히 전국 사찰투어를 다니며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건강을 챙겨가며 부부가 손잡고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과연 퇴직 후 저렇게 우아하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해봤다.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에서 언제 한번 자전거를 함께 타자면서 인사를 나눈 뒤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면서 생각을 해봤다. 갑자기 ‘바티칸’이 어는 국가에 있는 도시일까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장소로 알아들었다. 주변에서 여행 갔다 오면 흔히 말하는 중국 장가계라든가 태국 푸켓같은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마치 인근지역에 마실 다녀온 것처럼 별것 아니라는 뉘앙스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잠깐 동안 고민해 봤다. 내가 죽기 전에 사업상 또는 여행상 이탈리아를 다녀올 수 있을까 살짝 고민해 봤지만 결코 쉬운 결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갈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무튼,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바티칸 교황청’ 해프닝은 그렇게 끝났다. 그 사건은 신통치 않은 나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자리한 채 지워지지 않았다.

# 제아무리 휴대폰으로 신문기사를 검색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직도 페이퍼를 좋아한다. 그리고 새벽마다 집과 직장으로 배달되는 신문의 잉크냄새를 우선 맡아본다. 매일 같은 시간대에 들려오는 배달부의 발자국 소리도 영영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신문을 소리 내며 펼쳐볼 때 비로소 제대로 읽은 것 같고,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가위질을 해대는 즐거움을 죽을 때까지 빼앗기고 싶질 않다. 최근, 조간신문에서 일본 노인의 노후파산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충격적이었다. 80대 한 노인은 20년 전 퇴직할 때 그의 통장에 2억 5000만원의 예금이 있었다고 한다. 지난 40년 동안 직장생활을 통해서 모아 놓은 돈으로 검소하게 절약하면서 노후를 보내면 충분할 것으로 믿었단다. 그러나 퇴직 후 20년이 지날 무렵, 통장잔고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갑자기 아내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연금으로는 도무지 살 수가 없었고 매년 갈수록 적자액이 커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 노인은 깊은 한숨을 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비록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지난 40년간 성실히 일했고, 그 일한 돈으로 저축해서 남은여생을 즐기려고 했는데 이렇게 비참한 노후를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질 못했다.”

문제는 고령화다. 생각보다 빠른 진도로 가속화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65세 이상의 30%는 90세까지 생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의료기술의 발달로 65세 이상 고령인구 가운데 남성의 40%, 여성의 60%가 최소 90세 이상 생존하는 100세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일본의 한 잡지가 조사결과를 내놨다. 그러나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둔 일본 노인들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노후 파산을 맞이하는 노인 대다수는 성실하게 일하면서 행복한 노후를 준비해 온 평범한 소(小)시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력방송 NHK는 노후 파산 직전까지 몰린 노인들 대부분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사례가 많다고 보도한다. 그리고 아무리 절약하며 살아도 다음 달 연금이 들어오기 직전에 음식을 구입할 돈까지 떨어져 심지어 소면을 며칠씩 끓여 먹으면서 연명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소개한다. 결국, 기초연금과 회사 퇴직연금을 매월 받는다고 해도 비싼 거주비와 생활비를 지불하고 나면 손안에 쥐는 금액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오래 살면 살수록 적자액만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일본의 현 실정을 과감히 보여준다.

매달 약값과 치료비를 대고 나면 적자(赤字)를 벗어나기 힘들다. 매월 적자를 그동안의 예금으로 메운다고 해도 얼마 안 되서 바닥이 나는 현실 앞에서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아우성이다. 놀라운 사실은, 예금이 바닥나기 전에 죽고 싶다는 노인들의 리얼한 인터뷰를 보면 더더욱 그랬다. 과거에 잘나가는 고소득층마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직장생활을 하면서 평소에 소비했던 패턴이 남아있기에 퇴직이후에도 일정수준 이상의 생활비를 지출하는 경향이 높다. 그래서 이 상류층 그룹들은 퇴직이후 종종 해외여행 다니는 것을 시작으로 손주들 교육자금 대주고, 자녀들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 일쑤다. 그러다보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노후에 충분하리라 믿었던 예금 잔고가 갑자기 줄어든 것을 보고 그 충격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 내 생각도 그렇지만 예전처럼 어린 자식들에게 노후를 부탁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엄두도 못낸다. 어쩌면 ‘무(無)소식이 희(喜)소식’일 수가 있다. 새벽 댓바람부터 울려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대학병원에서 고액의 병원비 결제를 알리는 원무과 직원과 통화를 안했으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다. 평소 해왔던 것처럼 가족들끼리 가끔씩 만나서 맛있는 음식 먹고, 용돈 드리며, 명절날 제사상을 올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가끔씩은 언짢은 말다툼으로 원수처럼 안볼 것처럼 헤어지지만, 결국은 다시 만나서 툴툴 털고 겸연쩍게라도 웃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잘난 것 하나 없는 가족들이지만 그럭저럭 무탈하게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가 않다.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경제난으로 취업하지 못한 자녀들 때문에 부모의 경제력에 의지하는 캥거루족들이 갈수록 늘고 있어 골치다.

사실, 캥거루족이란 단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리턴 그루(return garoo)’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리턴(return)과 캥거루(kangaroo)의 합성어로 ‘돌아온 캥거루족’을 말한다. 부모 곁을 떠난 캥거루가 날이 갈수록 치솟는 거주비와 양육비용을 견디다 못해 다시 부모 곁으로 돌아오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한편으론 우스운 이야기지만, 참으로 큰일이다. 문제는 리턴 하는 자식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점이다. 돌아온 캥거루족들이 부모들의 충분하지 않는 경제력에 의지하면서 오히려 노후 파산을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전혀 예기치 못한 자식들에게 발목을 잡혀 버린다. 결국, 예상했던 예금 잔고기간 보다 훨씬 그 전에 만세를 부를 것이 뻔하다.

# 한국도 노후 파산이 심각한 일본처럼 예외가 아니다.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노후준비가 전혀 안 되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한국사회 역시 일본처럼 노후 파산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갈수록 노인 빈곤층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지금은 당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산층들도 퇴직이후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앞당겨지고 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만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결국, 노후준비를 발목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자녀의 높은 사교육비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하면 아름답고 당당한 노후를 기대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나을 듯싶다.

사실, 교육자금 만이라도 조금씩 줄여 나간다면 완벽한 노후준비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접점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충분히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두발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 대목에선 불필요한 사교육비부터 무조건 줄여 나가야 한다며 올 곧은 목소리를 내고 싶다. 간단히 정리하면, 노후자금의 최대의 적은 자녀 교육비라는 점이다. 돈 걱정 없이 노후에 살고 싶으면 당장 미친 사교육비를 점점 줄여 나가거나 없애야 한다. 단호히 말하고 싶다. 지금 당장, 과외 하나 줄여서라도 개인연금 하나라도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30~40대 부모들을 만나 재무 상담을 하다보면 자녀의 교육을 상당히 중요시함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소중하지 않은 자기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번 돈을 교육비에 쏟아 붇는 어리석음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우리 자녀만 이 경쟁사회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서 과도한 사교육비 소비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돈 먹는 자녀들이 모두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그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다. 자녀들을 위한 엄청난 교육비를 떠나서 자녀 결혼자금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노후준비라는 말만 나와도 눈앞이 캄캄하고 걱정이 태산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당장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십분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이 칼럼을 쓰는 본인 역시 매일 힘겹게 밥벌이를 하고 있는데다 예비 캥거루를 키우고 있는 한 부모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가정마다 처한 현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불합리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부모의 용기가 필요하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기 때문에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자녀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물론,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소외당하고 바깥일에만 오로지 열을 올리는 대한민국 아버지들도 이젠 깊숙이 개입해야 한다. 흉금 없이 자녀들의 쳐진 어깨를 토닥거려 줘야한다. 또, 자녀에 실망하는 배우자의 기대치를 내려주고 함께 웃어줘야 한다.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은 부모들이 겪었던 어제와는 전혀 딴판인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로운 희망을 건네 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인 베이비부머들이 100세 시대를 생존할 수 있다. 물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역시 각자 선택의 문제이고 보면 부모들이 매순간 갈림길에서 현명해 지도록 정신 차리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노후 난민이 되질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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