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브리핑] <15> 대전 대흥동 현상은 ‘슬럼화’

젠트리피케이션이 과연 대전에 존재하기는 한가? ‘대흥동 젠트리피케이션’ 집담회(集談會)에 초청받고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전문화연대(공동대표 박한표‧박은숙)가 주최하는 두 번째 ‘집담회’였습니다. <2월 22일, NGO지원센터>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본디 도시의 낙후 지역에 사는 저소득층을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대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최근에는 소규모 점포와 인디 문화가 거대 상업자본과 주류 문화로 대체되는 의미로 쓰입니다.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예술인들이 몰려들고, 이로 인해 정체지역이 활성화되면서 비싸진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게 된 예술인들이 다시 그 지역을 떠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대흥동 현상은 ‘젠트리피케이션’ 아니라 ‘슬럼화’

대흥동 문화예술의거리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부각된 것은 대전프랑스문화원 분원과 산호여인숙, 도시여행자 등이 건물주로부터 퇴거 통보를 받으면서부터입니다. 대흥동 문화벨트의 축을 담당했던 공간들이 없어지면 대전에서 가장 특색 있는 이 동네가 활력을 잃을 게 뻔합니다. 언론들이 앞 다퉈 젠트리피케이션을 거론하기 시작한 배경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얘기했듯 ‘대흥동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려면 전제가 필요합니다. 상업자본이 유입될 정도로 동네가 활성화돼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문화예술의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려 상권이 들썩여야 상업자본이 군침을 흘릴 텐데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돈을 퍼부어 걷기 좋은 거리를 만들었고 건물 외관이 깔끔해졌으며 간판정비도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원룸건물만 40여 동이 들어섰습니다. 대흥동 문화공간들이 떠난 자리에도 이런 건물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그러니 대흥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현상은 엄밀히 말해 ‘슬럼화’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합니다.

대흥동 문화예술의거리가 활성화됐다면 이런 현상이 빚어졌겠습니까? 오히려 자본 논리에 의해 개발압박을 받아야 했을 겁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고 계층이동입니다. 오히려 대흥동에 원룸이나 다세대주택이 늘어난 것은 동네가 갈수록 침체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빈민층이 중산층으로 대체되는 게 아니라 갈수록 더 빈곤한 동네가 된다는 거지요. 주변의 상권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게 자명합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해법 찾을 수 있어

젠트리피케이션이 자연스런 현상이라면, 이를 막을 대책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동네 빵집과 카페를 대형 프랜차이즈가 대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걱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더 소중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합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만 접근하면 대흥동 현상을 극복할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이 현상을 ‘슬럼화’라고 규정한 이유입니다.

'대흥동 현상'이 빚어진 건 소유주가 문화공간에 대여하는 것보다 원룸을 지어 임대수익을 얻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전적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뤄진 선택의 문제입니다. 소유주와 세입자 간 대립의 프레임으로 이 문제를 봐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소유주가 선택을 달리 할 수는 없는 걸까요?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게 보조금 정책입니다. 실상 보조금 정책은 상당히 소극적인 정책입니다.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지역에서는 보조금만으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임대료 등을 막을 수 없습니다. 대흥동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아닌 슬럼화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보조금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금융이자 부담과 준공 후 공실 등의 위험을 감수하느니 적정 수익을 얻는 게 낫다고 판단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보다 적극적으로는 대전시가 아예 건물을 매입하는 방편이 있을 겁니다.

근본적인 대책은 ‘도시재생’

보조금이나 건물 매입이 임시방편의 단기대책이라면 근본적인 대책은 없을까요? 도시재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도시정비사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동네를 깡그리 부수고 다시 짓는 ‘고비용’의 전면철거방식에서 일자리, 문화, 교육, 복지 등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저비용’의 도시 활성화 방식으로 말이죠. 정부가 도시재생법을 제정하고 각 도시가 도시재생 전략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대전시가 500억 원(국비 250억‧시비 250억) 규모로 추진 중인 중앙로 프로젝트 마중물 사업도 도시재생사업입니다. 정부 공모사업을 통해 선도 지역으로 선정된 데 따른 것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코어(core, 중심)가 지금의 옛 충남도청 부지란 겁니다. 도청사 뒤편 담장을 없애고 예술과 낭만의 거리를 조성하는 사업도 있습니다. 옛 충남 관사촌도 예술가 레지던스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됩니다.

헌 집이나 건물을 매입해 쌈지주차장, 예술인 창작촌 및 판매시설, 갤러리, 쉼터 등을 조성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고유자산을 활용하는 일입니다. 옛 도청사나 관사촌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전프랑스문화원 분원, 산호여인숙처럼 자생적으로 생겨난 기존 자산도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자산들이 도시재생에서도 당당히 한 축을 담당할 테니까요. 걷기 좋은 도시의 필수아이템은 문화이고, 문화는 벨트를 구축해야 사람이 골고루 몰린다는 뜻입니다.

인구유입, 비현실적 이상에서 깨어나야

도시재생이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대전시의 우선적인 정책방향 설정입니다.

대전의 원도심을 ‘문화특구’로 만들겠다, 무너진 상권을 살리겠다면서 도시팽창을 병행해선 안 될 일입니다. 대전시는 심지어 간선도로까지 없애가면서 호수공원이란 이름으로 아파트를 때려짓고 있습니다. 내 눈엔 인구를 늘리기보다 더 생산적인 도시를 만드는 게 시급해 보입니다. 대전시의 정책 우선방향을 문화와 원도심에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대전에 인구가 더 유입될 수 있다는 비현실적 이상에서 깨어나란 얘깁니다.

대전시가 대흥동의 문화시설과 예술인 인적현황에 대한 제대로 된 기준과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몇 년 전에 대전문화연대가 문화지도와 함께 원도심이야기를 3권의 책으로 엮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대전시가 예산을 지원했다고 생색내는 건 봤지만 만들어진 자료를 정책에 활용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대전시가 진짜 일 같은 일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대흥동, 아니 대전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5년, 10년 후 우리가 진짜 대전의 젠트리피케이션을 고민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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