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브리핑] <14> 사람과 도시의 소통

대전 중앙로 지하상가를 다녀왔는데, 불쑥 영화 한 편이 떠오르네요. 우디 앨런의 2011년 개봉작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입니다. 굳이 부제를 붙인다면 ‘공간의 시학(詩學)’이 적당할만한 영화입니다.

공간의 시학은 할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 길(오웬 닐슨)의 내면 갈등을 통해 드러납니다. 현실(시나리오 작가)과 이상(소설쓰기) 사이의 갈등이죠. 현실에 순응할 것이냐 꿈을 좇을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인공 길은 타임슬립에 빠집니다.

스토리 없는 도시 공간에선 존재도 무의미

시간여행은 파리의 낯선 골목길에서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길을 태운 클래식 푸조는 한 카페에 멈춥니다. 예술가들의 공간이죠. 그것도 그가 ‘황금시대’로 여긴 1920년대. 그는 그곳에서 매일 밤 살바도르 달리와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납니다. 주인공 길의 초현실적 만남은 ‘판타지’일까요? 우디 앨런은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파리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영화에서처럼 공간의 기억은 아주 특별합니다. 주인공 길처럼 현실과 꿈이 만나는 초현실적인 공간일 수 있고, 본질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되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리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들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카페 레 되 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라면 모를까요.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파리는 스토리가 가득한 도시입니다. 세계인이 파리를 동경하는 이유겠지요. 관광객들은 센 강변이며 공원, 골목길 구석을 거닐며 공간들과 소통합니다. 공간과의 소통이 가능한 것은 그것들에 파리지엥들이 축적한 삶이 녹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이를 넓은 의미에서 ‘문화’라고 부릅니다.

근대도시 대전을 파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우리는 정말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도시공간이지만 인간적 삶을 형성하는 데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는 도시, 존재의 역설입니다. 스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100년이 넘은 도시지만 공간에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부수고 새로 짓기에만 열중했습니다. 원도심에 넘치는 근대문화 유산이며 작가들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공간에 의미 부여해 준 '뻔뻔한 클래식'

중앙로 지하상가를 다녀와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떠올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날 지하상가 공연장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처음 봤습니다. 맥키스오페라단의 뻔뻔한 클래식이 그곳에서 처음 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건 공연도,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다고 인식조차 못했던 공연장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텅 비어있던 그 공간 말입니다.

공연장 바로 앞에서 생과일주스며 커피, 와플을 파시는 아주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봅니다. “저게 공연장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와 주스 한 잔 더 판 것보다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정말 행복합니다.” 그날 공연이 나와 그 아주머니에게 공간의 의미를 읽는 감성을 불어넣어준 겁니다. 인간과 공간이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주회사 맥키스컴퍼니의 조웅래(56) 회장은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계족산에 황토를 깔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더니 한국인이면 꼭 가봐야 할 관광명소로 만들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여는 축제도 그렇지만, 산속에 상설공연장을 만들어 성악가와 피아노를 올려놓은 발상은 정말 기발합니다. 정장 입고 음악회 가는 2%의 국민이 아니라 티셔츠 차림의 98%를 위한 공연이 주말마다 펼쳐지게 된 겁니다.

칭찬받아 마땅한 조웅래 회장

혹자는 조 회장을 폄하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쇼라고. 소주 한 병 더 팔려고 별 짓을 다 한다고. 과연 산에 황토 깔고 사람 모이게 하고 축제와 공연 여는 게 소주 한 병 더 팔려고 벌인 일들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신발을 벗기기까지 그가 얼마나 인내했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계족산에 황톳길을 깔고 관리해온지 10년, 숲속음악회는 9년을 이어왔습니다. 입시 준비에 지친 고3수험생과 교사, 학부모를 위한 특강과 찾아가는 음악회도 5년 동안 쉬지 않았습니다. 예쁜 여배우 모델을 내세우고 음식점 돌면서 선물 나눠주는 대신 그는 문화와 가치를 공유해왔습니다.

나는 조웅래 회장을 두 차례 인터뷰했습니다. 처음에는 뒤집어 생각해(逆) 새로운 일을 꾸미고(創), 이를 통해 대중을 즐겁게 하는(樂) 그의 삶을 ‘역(逆)‧창(創)‧락(樂)’이라고 정의했지요. 그런데 그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게 아니더군요. 사람을 배려하는(慮) 일을 꾸준히 하니 신뢰가 쌓이고(信) 비로소 함께 하는(共)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겁니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 그의 가치관 경영을 ‘여(慮)‧신(信)‧공(共)’으로 규정한 까닭입니다.

공간과 소통하는 감각 깨워줄 제2, 3의 조웅래 나타나길

그는 계족산에서 ‘여‧신‧공’ 있게 하던 ‘역‧창‧락’을 도심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알몸마라톤입니다. 작년 갑천에서 회사 임직원들과 알몸으로 뛰어본 뒤 반응이 좋아 올해부터 작정하고 사람을 모이게 했습니다. 1월 1일 11시 11분 11초에 출발하는 알몸마라톤은 새해맞이 행사로 전국적 이슈가 됐습니다. 이 일이 반복되다보면 대전시민의 갑천이 전 국민이 사랑하는 갑천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며 마련한 중앙로 지하상가 공연입니다. 이제 1~2월이면 매주 금 토요일 상설 공연이 벌어집니다. 그는 한 번 시작한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공연이 없는 날도 지하상가의 출발점인 이 공연장이 의미 있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한 페친이 으능정이 스카이로드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대전 은행동 (구)대전극장 골목 하늘이 블링블링(화려)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활기가 없어 보이는 것이 안타깝네요.”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는 공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준 글입니다.

최근 대전 시민과 6대 특‧광역시민을 대상으로 대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장소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가 윗글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전하면 엑스포를 떠올렸고, 대표적인 관광지와 랜드마크로 카이스트와 대전현충원을 꼽았습니다.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는 최하위를 차지했습니다. 예술가들과 소극장, 옛 추억을 간직한 카페들이 모여 있는 문화밸리가 대전 시민에게 조차 의미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는 얘깁니다.

내가 제2, 제3의 조웅래를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공간과 소통할 수 있도록 우리 감각을 깨워줄.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