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이 만난 사람] <13> ‘유성 갑’ 누비는 전 MBC 부국장

텔레비전의 위력이다. 처음 만났는데도 낯섦이 없다. 유권자들도 그를 만나면 나와 같은 느낌일까? 28년 MBC 기자생활을 접고 ‘정치판’에 뛰어든 최명길(54) 전 MBC 유럽지사장 얘기다. 현재 유성구 분구를 염두에 두고 가칭 ‘유성 갑’ 지역을 취재하듯 누비고 있다. 그를 지난 15일 대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야구가 좋았던 소년, 진짜 선수 될 뻔

그는 1961년 3월 대전 중구 문화동 충남기계공고 뒷산의 복숭아 재배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전상(戰傷)을 입은 군인이었다. 군 생활을 하다 과수원집 둘째 딸을 만나 결혼, 신혼집을 처가 근처에 차렸던 것.

어려서는 용두동에서 살았다. 서대전초에 다니는 누나를 따라 운동장을 뛰어다닌 기억이 어렴풋하다. 법원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는 충남 논산에서 다녔다. 일곱 살에 입학해 또래보다 실제 나이는 한 살 적다. 중학교 입학할 때쯤 다시 대전으로 이사해 선화동에 정착했다.

중학교는 한밭중을 다녔는데 수업 시간을 빼놓고는 야구만 했다. 그렇다고 선수는 아니었다. 그저 야구가 좋았다. “눈 떠서 잠들기 전까지” 오로지 야구생각뿐이었다. 성적은 ‘평범한’ 상위권. 공부에 다소 게을렀던 건 서울 부산에서 시작된 고교 평준화가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었기 때문.

그러다 상황이 돌변했다.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작고)이 고교평준화 전국 확대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중3이 되면서 바짝 고입준비에 고삐를 조였다. 그렇게 최고 명문인 대전고에 들어갔다. 당시 한밭중에서 15명가량이 대전고에 진학했다.

고교에 진학해서도 그의 야구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야구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날도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 고교 2학년 때였다. 야구부 선수 하나가 뛰어와서는 “감독님이 찾으신다”는 것. 연세대 야구단 사령탑을 지낸 이재환 전 감독이다. 이 감독은 대뜸 “공 한 번 던져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너 정도면 야구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어머니의 호통이 아니었다면 야구선수 최명길이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친구 권유로 우연히 MBC 공채 치러

대전고에서는 매년 120~150명 정도를 서울대에 보냈다. 전교 50등 언저리였던 그도 무난히 대학에 합격했다. 세계사를 유달리 좋아했던 그는 사회과학계열에 진학했다. 2학년 때 전공으로 외교학과를 선택했다. 학과는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시대는 미래를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항쟁, 계엄령선포 등. 군인들이 교내에 탱크를 몰고 들어와 상주하던 때다. 휴교가 반복됐다. 국가가 주관하는 고시를 치른다거나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에 회의를 느끼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도 그랬다. 그는 공부나 계속하겠다며 대학원에 갔다.

석사 학위를 받고 군 복무를 마쳤다. 미국 유학자금도 마련하고 직장생활도 경험할 요량으로 제일증권(현재의 한화증권)에 입사했다. 증권거래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침 정동에 있던 MBC가 그 옆으로 옮겨왔다. 고교 동창생인 주창만 프로듀서가 MBC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주 피디(PD)가 찾아와 수습기자 공채가 있으니 응시해보라고 권했다. 친구의 한 마디에 응시한 입사시험, 그것이 28년 기자생활의 시작이었다. 증권회사에 1~2년 더 다녔다면 교수가 돼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기묘한 타이밍에 터뜨린 노태우 오른팔 박철언 방북 ‘특종’

그는 천생 기자였다. 기자란 직업을 꿈꾼 적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그를 옭아맸다. 아니 스스로 그 직업에 집착했다. 특종도 여러 번 터뜨렸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서울올림픽에 투입됐다가 곧 정치부에 배정됐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이다. 일요일 아침,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뉴스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곧이어 임수경 방북사건이 터졌다. 5공 청산으로 궁지에 몰린 노태우정부는 공안몰이를 통해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바로 그때 충격적인 특종이 터졌다. 노태우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던 박철언 대통령정책보좌관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 고위당직자를 만나 비공식회담을 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정권이 한편에선 공안정국을 형성해놓고 다른 한편에선 북과 접촉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유수의 신문들이 확인되지 않은 이 사실을 MBC 인용보도로 1면에 대서특필했다. 정권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사실로 확인해줬다.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국민의 법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든 보도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극비리에 만나기로 합의한 뉴스는 보도하지 못한 특종이었다. 1990년 6월이었다. 실제 만남 약 1달 전 일이다. 당시 한국과 구(舊) 소련은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정상이 제3국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들에겐 놀라운 뉴스거리였다.

뉴스를 내보내기 열 시간 전쯤이었을까.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부처에서 MBC에 보도를 보류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국제사회에 큰 파장이 예상되니 소련 측과 보도시점을 협의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취지였다. 결국 이 특종은 언론계 비사(秘史)에만 남았다. 대신 유엔총회 기간 중 한중간 외교장관이 처음 만난 사실은 그의 특종으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1996년 12월 말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노동법날치기 파동을 일으켰다. 이는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쳤고 결국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머리 숙여 사과해야만 했다. 당 대표최고위원이던 이홍구 전 국무총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당연히 후임으로 YS가 누구를 내세우느냐가 최대 정치권 이슈가 됐다. 새 대표가 1년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실세인 민주계에서 당 대표가 임명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인제(현 새누리당 최고위원)냐 최형우(6선 국회의원, 전 내무부장관)냐 추측보도가 난무했다. 뜻밖에 YS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새 당 대표로 지명했다. 이에 앞서 내정설을 단독 보도한 언론사는 MBC였고, 9시 첫 뉴스의 마이크는 그가 쥐고 있었다. 

기자의 영예, 그러나 매일 벼랑 끝에 서야 하는 워싱턴특파원

그는 워싱턴특파원으로 39개월 근무했다. 세계 정치‧외교의 중심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일한 다는 건 기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영예로운 일일 터. 그러나 정작 그들은 하루하루를 절벽 위를 걷는 느낌으로 산다. 다루는 기사 자체가 한반도 안보 아니면 한미 간 주요 이슈이기 때문. 특종을 잡으면 파장이 크지만, 낙종하면 눈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밤낮 없이 조마조마하게 살았다”고 했다.

시간을 쪼개 쓰는 방법도 유별나다. 초저녁에 식사를 마치면 8시, 늦어도 9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새벽 2시(한국시간 오후 3시)에 사무실로 출근할 수 있다. ‘9시 뉴스’를 제작해야 해서다. 새벽 한시 반 알람소리와 함께 깨어나 포토맥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15분가량 자동차로 달리는 매일의 반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살다보니 금세 몸무게가 4~5㎏씩 빠진다. 워싱턴특파원으로 나갔다가 병들어서 돌아오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더 고생인 사람은 특파원의 아내다. 아이들 공부시키랴, 낮밤 거꾸로 사는 남편 챙기랴.

그는 2003년 워싱턴특파원으로 파견됐다. 2차 걸프전이 시작되던 때다. 부시정부가 한국에 파병을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었다. 노무현정부는 병력 구성과 파병 규모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한국정부가 미국에 통보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날, 그 내용을 가장 먼저 입수한 게 바로 그였다.

대대병력을 파견하되 비전투병력을 보내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방침이 골자였다. 일정 기간 양국이 비공개를 약속한 사안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특종보도였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미국, 중국, 북한이 4자간 회담을 열고 이를 일본과 러시아가 포함된 6자 회담으로 확대키로 한 내용도 그가 첫 보도한 뉴스였다.

두 차례나 MBC사장 최종명단 올랐지만 실패…‘권력의 선택’ 못 받은 이유?

그는 자신의 인생이 배인 MBC 사장자리에 뜻을 품었다. 사장 경선에 두 차례나 출마해 모두 최종 명단에 올랐지만 실패했다. 그는 “돌이키고 싶지 않다. 회한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고 했다. “현재의 MBC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뿐”이라고도 했다. 이는 그가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동안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그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권력이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2014년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에서 마지막 2명을 놓고 투표를 벌였다. 결과는 5대 4. 한 표차 패배였다. 그는 이 한 표 차이를 ‘권력’이라고 했다.

그는 MBC 구성원들의 많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속내가 무엇인지 곱씹어봤다. “공정한 공영방송이 되려면 사장을 선임하는 절차와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룰(rule)을 바꾸는 건 결국 국회가 할 일”이라고 했다. 그가 왜 정치를 선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방송은 국민의 행복과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고도 했다.

그가 사장이 되지 못한 이유는 권력의 통제 욕구에 반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황을 살펴보자.

워싱턴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정치부장으로 활약했다. 2009년 가을부터는 라디오 아침뉴스 진행자가 됐다. 그러다 2010년 말쯤 사측으로부터 갑자기 뉴스를 그만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부국장 승진할 때가 됐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그는 동기 중 가장 먼저 부국장이 됐다. 하지만 사내에선 ‘MB(이명박 전 대통령)에 비판적 발언을 쏟아낸 그를 방송에서 배제시킨 것’이란 이야기가 파다했다. 떡을 주고 마이크를 빼앗은 셈이다.

MB정권에 비판적 어조… 없던 유럽지사장 자리 만들어 발령

비슷한 일화는 또 있었다. 2011년 4월말 ‘세계는 우리는’이란 인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개그우먼 김미화가 4.27 재보선을 사흘 앞두고 자진 하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중은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김미화씨가 그만하겠다고 통보한 당일 프로그램 진행자로 그가 투입됐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파문이 커질 것을 우려해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말이 덜 나올 사람을 낙점했다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당시 김재철 MBC사장은 MB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정치부기자 선배로 함께 현장에서 뛰기도 했다. 그해 10월 7일 MB가 내곡동 사저 땅을 구입하면서 경호실 예산이 편법으로 투입됐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그는 ‘세계는 우리는’ 프로그램의 30분을 이 사건에 할애했다. 그날 MBC는 9시 뉴스에서도 이를 다루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안 돼 파리로 떠났다. 없던 유럽지사장 자리를 만들어 발령을 낸 것. ‘MBC 잔혹사’의 일부다.

2008년 총선부터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다. 여야 모두 수도권이나 고향인 대전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까지 그는 MBC에서 자신의 더 큰 역할을 찾고 싶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비례대표 후보를 제의했다. 선대위 대변인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민주당에서 신경민 전 MBC 앵커를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아마도 새누리당에서 맞상대로 보다 젊은 기자를 영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거절한 게 아니라 고사한 것”이라고 웃어넘겼다.

더구나 MBC 기자들이 김재철 전 사장의 퇴임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후배들이 파업한 마당에 국회의원 되겠다고 사표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사회를 위해 할 일이 있다면 방송을 통해 하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7‧30 재보선 자진 하차… ‘유성 갑’서 정치 꿈 펼칠 터

그런 그의 바람은 앞서 얘기했듯 연이은 사장 도전 실패로 수포가 됐다. 마침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의 새정치민주연합이 대전 대덕구 출마를 권유했다. 지난해 7‧30재보선이었다. 당은 앞선 6‧4지방선거에서 권선택 대전시장을 비롯해 대덕구를 제외한 구청장을 새정치가 휩쓸어 승산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인으로 볼 수 없는 사전 인지도 조사결과가 나왔다는 설명과 함께 당의 적극 지원사격도 약속했다.

그런데 선거구도가 일그러졌다. 서울 동작구에서 멱살잡이 파동이 일어나고 광주에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전략 공천하는 등 ‘새정치’라는 구호가 무색해졌다. 선거 결과는 11대 4, 새정치민주연합의 참패였다. 손학규 전 대표까지 정치신인에게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지도부 모두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경선을 앞두고 스스로 선거판에서 물러났다. 그는 “계속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고 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건 MBC 사직서뿐이었다.

그는 박영선과 문희상으로 이어진 비대위에서 당 대표 공보특보와 정무특보 등을 맡았다. 그러다 지난 4월부터 대전 유성에 정착했다. 유성구가 분구가 될 것을 확신하고, 정치의 꿈을 이곳에서 펼쳐보겠단 심산이다. 그의 어머니가 노은에 살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중도적 성향”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집권 후 새누리당이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꼴통보수’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등 논쟁과 분란을 일으켜 이득을 보려는 행태를 보면서 새누리로 갔으면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했다.

‘문제 해결’이 정치의 본령… 유성 동네방네 취재하는 게 일상

그에게 정치 이상(理想)이 뭐냐고 물었더니 ‘문제 해결’이란 답이 즉각 돌아왔다. “저 정치인과 대화를 하면 무언가 해결이 되는구나하는 생각을 드리고 싶은 게 목표”라고 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시각이 전제돼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기자로 살면서 그런 시각은 갖췄다”고 자신했다.

‘문제 해결’을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란 정치의 전통적 개념과 결부시키기도 했다. “돈이든 서비스든 가치를 논란의 소지가 없도록 권위를 가지고 나누어 주는 것이 문제 해결”이라고 설명했다. 정치 불신이 팽배한 데 대해서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인데 정반대로 가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들께서도 본래의 정치 역할을 되찾으라고 촉구하시고 단념하지 마시라”고 당부했다. “본래의 정치를 잘 할 사람을 두 눈 똑바로 쳐다보고 맡겨주셔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정치의 지향점은 ‘포용’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휩쓸려 경쟁을 유도하고 탈락하는 사람을 배제시키다보니 잘 뛰는 사람끼리 달려가는 형국이 됐다고 현대사회를 진단했다. 결국 배제된 사람이 많아져 전 지구적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 그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인디언 속담을 인용해 “천천히 가더라도 같이 가는 게 결국 길게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배제하지 않는’ 포용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삼성전자를 예로 들었다. 삼성이 휴대폰을 많이 판다고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 삼성전자가 경쟁력을 유지하더라도 배제된 사람들, 즉 빈곤층이 늘어 아이를 낳지 않고 소비력이 낮아지면 결국 시장이 없어져 장기적인 불황에 빠지게 된다는 논리다. 그는 “대기업이 시장을 유지하려면 3세, 4세가 계속 태어나고 계속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번 돈의 절반쯤은 결혼하고 출산하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데 쓰는 게 포용이고, 기업이 영속하는 현명한 방법”이라고도 했다. 

그는 요즘 공부하고 쏘다니는 게 일상이다. 사무실에 대전 지도, 유성 지도를 붙여놓고, 다양한 통계자료도 들여다보고 있다. 취재하듯 수첩을 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는 것도 일과가 됐다. “유성이 대전에서 비교적 잘 살고 재정자립도가 높다지만 사회문화적 인프라는 열악합니다. 실내체육관 하나 없고 제대로 된 공연장도 없어요. 문제 해결, 포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답니다.”

방송기자 28년, ‘문제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최명길. 그가 현실정치에서도 ‘특종’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최명길은?
1961년 대전 출생
한밭중 대전고 서울대 외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MBC기자, 워싱턴특파원, 보도전략팀장, 정치팀장, 보도국선임기자, ‘뉴스의 광장’ 앵커, 보도제작부국장, 유럽지사장
극동문제연구소(경남대) 초빙교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정무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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