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이 만난 사람] <7>민주주의 확장시킨 공직 33년의 삶

한강이남 최대 인터넷신문인 <디트뉴스24>가 제20대 총선을 1년 여 앞두고 ‘챌린지 2016 총선’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현역 정치인의 아성에 도전하는 챌린저들, 특히 참신한 신진 정치인을 발굴 응원하고자 합니다. 국회의원을 지낸 적이 없거나 지역구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는 분들을 1차 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디트뉴스의 ‘챌린지 2016’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질책 당부 드립니다. <편집자 주>

그는 국가시스템의 설계자다. 행정절차법의 틀을 짰고 공무원 교육훈련제도의 골격을 만들었다. 행정규제기본법의 주춧돌을 놨고, 국가기록 관리체계를 혁신했다. 박근혜정부의 혁신 프로그램인 정부 3.0도 그의 손에서 시작됐다. 30년 공직생활을 접고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는 박찬우(56) 전 안전행정부 1차관이다.

‘선비의 삶’ 가르쳐준 선조부

그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직업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유학자인 선조부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조선후기 실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19세기말 개화운동의 대명사인 박영효,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박정양 등 반남박씨(潘南朴氏) 집안의 내력을 옛날이야기 하듯 해줬다. ‘선비’의 삶을 대물림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는지 소년은 공직을 천직이라 여겼다.

그는 천안중을 졸업하고, 당시 4대 공립고였던 용산고에 진학했다. 항상 아들을 자랑스러워  했고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로 보내면서 1년에 두 차례 명절에만 집에 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고속버스를 탔다. 자애롭게 자식들을 품었던 어머니 덕분이다. 엄부자모(嚴父慈母)의 전통적인 가정환경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처음 생겼을 때였습니다. 버스가 천안 나들목에 진입할 때면 정말 마음이 푸근해졌어요. 어릴 적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던 유량천이 흑백필름처럼 떠올랐지요. 공직을 마치면 고향에 내려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그 때부터 했습니다.”

공직 이외의 직업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는 성균관대 행정학과에 갔다. 목표는 뚜렷했지만 대학생활 2년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행정학과가 법대 소속이다 보니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상당수였다. 그도 법관이냐 행정가냐를 놓고 기로에 서 있었다. 이 문제는 헌법학 강의를 듣고서야 정리됐다. 소극적 법 집행보단 적극적 법 집행을 선택한 것.

“법관은 정의의 수호자이자 최후의 보루지만 이미 만들어진 법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반면 행정가는 정책과 사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법을 집행합니다. 새로운 법도 만들어야 하고요. 법관은 성실하고 정직하면 되지만 행정가는 기획하고 집행도 합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행정부 공무원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행시(24회)에 합격했다.

군사정권에서 절차 민주주의의 틀을 짜다

“공직 33년 정말 바쁘게 살았지만 기억나는 건 서른세 가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공직생활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는 건 굵직굵직한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번 보직을 맡으면 꽤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켰다.

그의 회고는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인 행정개혁위원회가 총리실 산하 행정조사연구실로 흡수됐다. 그는 행정조사연구실에서 ‘행정의 헌법’이라는 행정절차법 제정 작업을 맡았다.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규정하는 법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것이다.

법 제정 작업은 ‘맨 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행정절차법에 대한 이해나 공감대가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 이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 한 명이 없었을 정도. 스스로 전문가가 돼야 했다. 국내 연구 자료가 없어 해외 출장을 다니고 사례를 모았다. 자나 깨나 ‘행정절차’만 생각하고 말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박 절차’였을까.

대륙법이냐 영미법이냐 공법학자들 간 치열한 논쟁을 중재하며 2년 만에 법안을 만들었다. 법제처 심사를 거쳐 국회에 제출했는데, 여야가 대치하면서 상임위원회에서 심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어쩌면 절차적 민주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 그 때 그 시절엔 시기상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국회를 통과해 법률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행정절차법의 틀을 짠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유다.

공무원 국외훈련제도의 골격을 만들다

공무원 국외훈련제도의 골격을 만든 것도 그다.

그는 사무관 시절 공무해외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인디애나대학 공공관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총무처 교육훈련과에 발령받았다. 글로벌 인재양성업무가 주어진 것.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국외 장기 훈련은 미국, 일본, 유럽 중심이었다. 그는 종전의 훈련관행으로는 수출다변화와 국제협상 증가 추세를 뒤따라가지 못한다고 봤다. 그래서 중국, 러시아, 중남미 등 제3세계로까지 훈련 대상국을 확대했다.

문제는 중국. 아직 양국 간 수교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안기부(현 국정원)와 중국당국과 협의가 필요했다. 그는 이를 통해 북경대, 청화대, 인민대에 연간 15명씩 3년간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러시아, 중남미 국가들과도 같은 방식의 장기훈련 협약을 맺었다. 이때 양성된 지역전문가들이 각 부처에서 FTA(자유무역협정) 등 각종 국제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한중교류협정에 얽힌 비화도 재밌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체결됐다. 그는 정부 간 인사교류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중국에서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연변조선족자치주 고위 인사가 숙소로 그를 찾아왔다. 조선족자치주 공무원들을 한국정부가 초청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외교적으로 매우 미묘한 사안이었다. 연변이 우리 고토라는 인식이 폭넓게 퍼져 있고, 중국이 그런 우리 국민의 인식을 경계했기 때문.

한‧중 외교 분쟁을 우려해 정부 초청이 아닌 ‘박찬우 개인초청’으로 연수를 추진키로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대외원조자금 2억 원도 확보했다. 그해 가을부터 연변 조선족 간부공무원들을 매년 두 차례, 20명씩 초청했다. 그런데 초청직후 문제가 생겼다. 중국정부가 한국관광객들이 동북3성을 자신들의 옛 영토라는 '낭설'을 퍼뜨린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 이붕 당시 총리까지 나서 '내정간섭'이라고 경고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 공무원들이 한국에서 연수를 받는다니 중국정부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형식이 개인초청 연수이다 보니 한국정부에 항의할 근거가 부족했다. ‘한국정부가 관여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집요하게 캐물었다.

조선족 공무원 초청연수는 결국 양국 정부 차원의 교류연수로 바꿔 추진하는 선에서 타결이 이뤄졌다. 마침 양국 정부 모두 한중교류 확대를 위해 인사교류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지금도 일 년에 두 차례 30명의 중국 공무원이 한국에서 연수를 받는다. “이 프로그램으로 중국정부에 지한파(知韓派)가 많이 생겼지만 초기 조선족 위주이던 연수자들이 지금은 대부분 한족이란 점이 아쉽습니다.”

국제기구나 외국정부기관에 직무훈련을 보내는 프로그램, 선진문물을 배워오기 위한 정책연수 프로그램도 그가 시작했다. 그는 한 자리에 무려 5년 가까이 있으면서 교육훈련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그가 만든 국외훈련제도의 틀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YS 청와대 이어 DJ 청와대에서도 일하다

그는 YS(김영삼 전 대통령) 정부 때 과장으로 승진했다. 첫 보직은 국무총리 의전비서관. YS는 ‘세계화’를 강조했다. 세계화 추세에 맞게 불필요한 행정규제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인 행정규제의 신설을 억제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에게 새로운 업무가 주어졌다.

총무처 행정제도과장으로 발령받은 그는 곧 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행정규제기본법. 이 법도 그가 초(草)를 만들었다. 후에 소관 업무가 총무처에서 총리실로 이관되면서 각 부처의 규제개혁업무를 총괄하는 규제개혁조정관실이 생겼다. 규제개혁조정관실의 근거법이 바로 행정규제기본법이다.

정권 1년여를 남겨두고 YS 청와대가 그를 불렀다. 그곳에서 외환위기를 맞았다. 수평적 정권교체도 지켜봤다. 정권이 바뀌자 그는 짐을 쌀 채비를 했다. 그런데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권이 그를 붙잡았다. 여야가 바뀐 상황에서 전 정부의 공무원이 청와대에 잔류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와 함께 살아남은 공직자는 셋이다. 박명재 국회의원(새누리)이 비서관이었고, 그는 정진철 인사수석과 함께 행정관으로 일했다.

정권 이양 시기에 복잡한 일이 한 둘이 아니었을 터. 야당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다보니 실타래를 풀어줄 경험자가 필요했다. 특히 새 정부가 출범하려면 직제개편과 인사가 큰 과제였다. 정부조직은 그가, 인사는 정진철이 전문가였다. 그는 DJ정부가 표방한 ‘작은 정부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구조조정을 도맡았다. 그렇게 2~3개월 돕기로 했던 것이 1년, 2년이 됐다. 공무원들이 정치적 색깔이 없다는 걸 DJ정권 사람들이 이해한 결과다.

시장과 부시장을 동시에, 지방행정 경험을 쌓다

청와대를 떠날 무렵 그는 지방근무를 자청했다. 지방행정 경험을 쌓고 싶어서였다. 충남 논산 부시장 자리가 그에게 돌아왔다. 심대평 전 충남지사의 인재영입 욕심도 작용했다. 그런데 당시 전일순 논산시장(작고)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시장으로 부임한지 3개월 만에 시장과 부시장 ‘1인 2역’을 해야 했다. 직무대리, 권한대행을 13개월이나 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시장이 궐위가 된 상태에서 행정체계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했다. 구체성이 떨어지는 분야별 발전계획을 구체화시키고, 장기적인 청사진도 그렸다. 분야별 자문교수단도 운영해 업무수행에 그들의 지혜를 빌리도록 했다. 헌신적이지만 새로운 기획업무에 어려움을 느끼는 공무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공정한 인사는 물론 법적으로 수의계약을 해도 문제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경쟁 입찰에 붙이도록 규정까지 바꿨다. 시장권한대행이 되고 찾아오던 방문객들이 그 때부터 거의 없다시피 됐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일도 급했다. 그는 “한수(漢水) 아래에는 여당도 없고 야당도 없다. 오직 논산당만 있다”고 호소했다. 시정발전위원회를 자주 열어 시정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행정동우회도 열어 선배 시장 군수, 공직 선배들에게 조언도 얻었다. 시민들은 마흔을 갓 넘긴 젊은 부시장의 진정성을 믿기 시작했다.

보궐선거를 통해 임성규 시장(작고)이 당선됐다.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 했다. 국‧과장, 읍‧면장 인사권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시장 역할을 1년이 넘도록 한 터다. 새 시장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침 행정자치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오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그런데 임 시장이 간청하다시피 막았다. 다음 선거가 1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 행정을 책임져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일단 심대평 지사와 상의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심 지사가 먼저 연락해왔다. 연말까지만 더 있으라고. 임 시장이 심 지사를 찾아가 부탁을 했더란다. 그는 더 거절할 수 없어 부시장 직을 계속 수행했다. 임 시장은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 인터폰으로 불러도 될 일을 ‘차나 한 잔 달라’며 부시장실로 직접 찾아와 상의를 했다. 인사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인사와 관련해 메모 한 장 받은 게 전부”라고 했다.

그는 임 시장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행정자치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발령받은 뒤 논산시정에 참고해 달라며 25쪽짜리 자료를 만들어줬다. 일종의 시정 참고서인 셈이다. 후임 부시장에게도 같은 자료를 건넸다. 그제 서야 편한 마음으로 서울행 새마을호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기도하고 간 국가기록원장, 나라의 역사를 세우다

그는 크리스찬이다. 공직자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자리는 2년간의 국가기록원장이다. 그는 “기도를 하고 간 자리”라고 표현했다.

노무현 정부 때다. 허성관 해양수산부 장관이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오더니 그를 국가기록원장으로 발탁했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김병준 위원장이 그를 원했는데, 허 장관이 쓸 데가 있다고 막았다. 그러더니 한 달 뒤 그를 기록원장으로 보냈던 것. 당시 그는 아내와 작정하고 40일 새벽기도를 다녔다. “기도하고 간 자리”란 이런 뜻이다.

부임하고 기록원을 들여다보니 특정정권과 관계없이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공직자로서 평생 할 일을 만났다는 기분도 들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관심이 컸다. 그런데 기록에 성역이 있었다. 국정원, 검찰과 경찰, 군, 청와대 등 권력기관은 기록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국가기록물 관리는 한 나라의 역사를 세우는 일. 성역을 없애려면 ‘기록 관리법’ 개정이 필요했다.

권력기관들의 저항은 생각보다 거셌다. 검찰은 수사기록을 어떻게 넘기느냐며 강력 반발했다. 그는 감사원과 공동으로 검찰의 기록관리 실태를 감사했다. 온도와 습도 조정이 안 되는 문서고에 수 십 년간 방치된 기록물이 눌어붙어 있었다. 심지어는 만지면 부서져 내리기까지 했다. 실무자에게 사진을 찍도록 해 수백 장의 사진을 법무부장관에게 보냈다. 결국 30년 간 비밀보호를 해주기로 하고 검찰 기록 이관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검찰이 기록이관에 동의하자 경찰과 군도 따랐다. 그런데 국정원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국가기록원의 보안체계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정원을 설득하는 데 반년이 소요됐다. 비밀보호기간을 50년으로 하고 국가기록원 보안체계를 국정원과 공동으로 만들자고 제의했다. 현재의 보안체계는 그 때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기록물에 성역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다. 대통령기록물이 남았다. 대통령기록은 최고 권부의 기록. 퇴임하면 다음 정권이 악용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기록물을 사유화하거나 소각해 버리는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미국에서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 이후에야 기록물의 국가소유 및 관리 원칙이 법적으로 확립됐다. 그가 대통령기록법 제정을 추진한 이유다.

“검찰의 국가기록원 압수수색에 자괴감”

여기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기록혁신에 관심이 컸다. 국가기록원이 국가기록 관리체계의 핵심이 될 수 있도록 국가기록 관리체계 개선기획단을 별도로 만들었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에 국가기록혁신전문위원회도 설치했다. 국가기록원장인 그도 대부분이 역사학자, 문헌정보학자인 17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다.

2005년 4월, 국가기록혁신로드맵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문제가 된 건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설치안이었다. 국가기록원과 교육부 소속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합해 장관급 위원회를 만들자는 게 뼈대 내용이었다. 정부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혁신위원회가 보고서에 포함시킨 것. 첨예한 논쟁은 대통령 앞에서 벌어졌다. 그는 이때의 논쟁을 ‘4‧7대첩’이라고 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영교 행자부 장관과 그는 기구개편안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은 ‘회의 그만 하자’며 일어섰다. 대통령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청와대 참모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대통령회의란 게 사전 조율을 거쳐 합의된 내용을 보고해야 하는데, 대통령 앞에서 이견을 드러내고 싸웠으니 당연지사다. 회의 후 만찬까지 취소됐을 정도.

청와대를 빠져나갈 찰나 노 전 대통령이 장관을 찾았다. 한참 후 면담을 마치고 나온 오 장관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그에게 ‘소주나 한 잔 하러가자’고도 했다. 대통령이 행정자치부를 중심으로 기록관리 혁신을 추진하라고 지시했기 때문. 기록관리 혁신 주도권이 혁신위원회에서 국가기록원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는 “기록관리 혁신을 시스템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중을 잘못 읽은 탓에 혁신위의 보고가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튿날 혁신위원들에게 다시 힘을 합치자고 간곡히 제의했다. 그리고 6개월 후 혁신로드맵이 만들어졌다. 다시 2개월 후 그는 대통령과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학계와 정부가 합의를 통해 만든 혁신로드맵을 보고할 수 있었다.

기록혁신에 관심이 컸지만 정작 노 전 대통령은 본인 재임 중 만든 대통령기록법을 위반했다.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이지원의 대통령기록 일체를 복사해 봉하마을로 반출해서다. 이중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 회의록도 포함돼 있었다. 더구나 회의록은 국가기록원으로도 이관되지 않았다.

그는 검찰이 국가기록원을 압수수색한 데 대해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국가기록원은 범죄자가 아닙니다. 기록원은 검찰에 대해서도 국회에 대해 했던 것처럼 대통령기록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강력히 요청해야 했고, 압수수색 영장에 대해서는 접수를 거부해야 했습니다.” 대통령기록법에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고 10일 이내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국가기록원은 2007년 10월 국회의 요구에 대해서는 그렇게 했다.

절차 민주주의에서 시작한 공직, 참여 민주주의로 끝맺음

그는 정권마다 주요 직책을 도맡다시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차관급인 소청심사위원장에 임명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임기가 절반쯤 남았다. 그는 유정복 행정자치부 장관 내정자를 찾아가 사의를 표했다. 국가공무원법에 의해 3년간 임기가 보장된 자리였지만, 정권이 바뀌었으니 정무직으로서 물러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사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말 혼자서 집무실 짐을 뺐다.

그런데 인수위원회 사람들이 자문을 하라고 요청했다. 행자부에서 조직실장도 했으니 정부조직개편에 참고할만한 내용을 브리핑해달라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 갔더니 유민봉 인수위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전 국정기획수석)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이유가 됐는지 박근혜정부 안전행정부 1차관에 발탁됐다.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듯.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행정절차법 제정 작업으로 첫 공직을 시작했는데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정부 3.0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자리가 됐더군요.” 행정절차법과 정부 3.0은 정보의 개방공유와 참여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한다는 의미였다. 정보공개법도 행정절차법에서 나왔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수미일관(首尾一貫)의 삶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틀을 만드는 것에서 공직을 시작해 참여민주주의를 확장하는 일로 마무리했으니.

언론은 그를 ‘정부 3.0 전도사’라 불렀다. 정부혁신을 위해 ‘정부 3.0’을 설계하고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기를 6개월. 당에서 그에게 지방선거 출마를 권했다. 그는 “정부 혁신을 담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출마하느냐”고 거절했다. 별 얘기 없이 해를 넘겼다. 이듬해 2월말 선거법이 정한 공직 사퇴시한을 앞두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출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게 그의 표현이다.

엘리트 행정가의 현실정치 도전, 성공할까?

정당이 기초단체장 공천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참 여야 간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야당은 폐지, 여당은 유지하자는 쪽이었다. 대신 여당이 내세운 게 상향식 공천이었다. 선거를 3개월 앞두고 경선을 하는 상황이 됐다. 그것도 당내 기반이 전무한 상태에서.

4명을 대상으로 1차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가 1등을 했다. 3, 4등이 컷오프 탈락하고 1,2등 결선만 남겨뒀다. 그런데 2등이 경선을 포기했다. 그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경선을 다시 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는 패배했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는 불복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력이 부족했든 사람이 부족했든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그는 현재 새누리당 천안 갑 조직위원장에 공모한 상태다. 1차 관문은 통과했다. “차관 자리는 내 손으로 사표내고 나왔지만 선거를 통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는 “아직 가슴이 뜨겁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당내 정치 기반이 없다”고 인정했다. 미묘한 시점에서 말을 극도로 아낀 박찬우 전 안전행정부 1차관. 그가 뿌리를 정당에 굳건하게 박고 현실정치 도전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박찬우는 1959년 4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천안 남산초등학교와 천안중학교를 졸업했다. 용산고와 성균관대를 나와 서울대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공공관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행정학 박사 학위는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에서 취득했다.

24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총무처 제도과장,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국무총리실 의전과장, 논산부시장 겸 시장권한대행, 행정자치부 기획예산담당관, 국가기록원장, 연금복지정책관, 대전시 행정부시장, 행정안전부 조직실장, 기획조정실장 등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차관급 정무직인 소청심사위원장과 박근혜정부의 초대 안전행정부 1차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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