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이 만난 사람] <4> ‘혁신의 아이콘’ 넘어 더 큰 정치 꿈꾸다

한강이남 최대 인터넷신문인 <디트뉴스24>가 제20대 총선을 1년 여 앞두고 ‘챌린지 2016 총선’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현역 정치인의 아성에 도전하는 챌린저들, 특히 참신한 신진 정치인을 발굴 응원하고자 합니다. 국회의원을 지낸 적이 없거나 지역구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는 분들을 1차 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디트뉴스의 ‘챌린지 2016’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질책 당부 드립니다. <편집자 주>

“헌정사를 오욕으로 얼룩지게 한 누적된 독재세력을 타파하여 국민의 진정한 자유와 민권을 수호하고 경제정의와 사회윤리를 확립하여 국민을 불안과 갈등 속에서 구하고 나아가 민족 재통일의 위대한 성업을 완수하기 위해 민주주의 국민정당 민주당을 창당한다.” 1990년 6월 15일 이기택 총재가 창당선언을 했다. ‘3당 합당’을 반대하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과 박찬종, 이철 등 무소속 의원들이 창당한 ‘꼬마민주당’이다.

노무현 의원은 ‘5공 청문회’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됐다. 정치참여를 꿈꾸던 청년은 그를 보면서 ‘저런 분이라면 함께 정치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꼬마민주당 창당은 기회였다. 이력서 한 장 달랑 들고 무작정 당사로 찾아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광재 비서관(노무현 의원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의원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소열 전 서천군수가 현실정치에 입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철학적 고민

나소열은 1959년 5월 충남 서천에서 방앗간 집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근면 성실한 부모님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7살에 학교에 보냈더니 적응을 하지 못했다. 걸핏하면 학교 가기 싫다고 울기 일쑤였다. 1,2학년 때는 반에서 꼴찌를 다툴 정도로 학업도 부진했다. 3학년이 되고 학급임원을 뽑았는데 부반장이 예쁜 여학생이었다.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성적이 쑥쑥 올랐다. 4학년 때부터는 반장, 부반장을 도맡았다.

무시험 1회로 서천중에 입학했다. 베이비부머 세대인지라 학급당 인원이 60명쯤 됐다. 등하교 길은 산을 넘어 왕복 4㎞. 지금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는 게 아무래도 이때 다진 체력 덕분인 듯하다. 초등학교 때 핸드볼선수를 했을 정도로 운동신경에는 자신 있었다. 축구, 철봉 등 체육만큼은 또래집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성적도 우수반에 들어갈 정도로 상위권을 유지했다.

고등학교는 공주사대부고를 갔다. 셋째 형은 재수를 해 그와 같은 해 공주고에 들어갔다. 형과 하숙을 같이 했는데, 그의 동네 친구까지 세 명이 한 방을 썼다. 그러나 친구는 곧 다른 하숙집으로 옮겼다. 그와 형이 공이나 차러 다녀 공부에 방해가 됐기 때문. 고교시절은 정신적으로도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한창 사춘기 소년이 그렇듯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 지냈다. 친구들은 그를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웃기는 소리를 많이 해 ‘코미디언’으로도 통했다. 내적 방황을 감추려는 심리가 작동했을 것이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교에 갔다. 대학생활은 본격적으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동양철학과 역사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학으로 사서삼경을 비롯해 노자, 장자, 한비자, 관자, 열자 등을 탐독했다. 사회적인 관심보다는 개인의 철학을 정립하는 데 집중했다. 경제사에도 흥미를 느껴 부전공으로 경제학도 공부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유교철학특강이란 과목이었다. 교수가 위나라 사람 장제(蔣濟)의 시를 칠판에 썼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 것도 보탠 것이 없거늘 죽어서 무엇을 잃을 것인가.’ 그 시의 첫 구절이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 한 일이 없지 않은가. 우주의 조화에 의해 내가 태어났을 뿐이니 존재의 귀함이나 천함은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닌가.’ 그는 존재의 고민을 내려놨다. ‘해탈’에 이르렀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인생이 덤에 불과한 것이니 이제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양한 사회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내면의 평화는 거짓… 정치에 뛰어든 이유

<수타니파타>(불교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경)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부처가 면벽수도 끝에 대중 속으로 오신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연히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니 고통스런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대의 아픔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잠시나마 나를 찾았다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은 것은 거짓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 한, 고통스런 사람들이 있는 한 내면의 평화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하지 않는 한 혼자만의 평화는 이기적인 것일 뿐 지속될 수 없었다.

‘함께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역사상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사회는 결코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한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훌륭한 정치가 있었을 때뿐이었죠.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효과적인 방법은 정치뿐이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막상 정치를 하려니 지난 4년의 대학과정으로는 아쉬웠다. 어떤 틀을 가지고 정치를 할 것인지, 이념적 철학 정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전통 중국 이데올로기와 현대 중공 이데올로기 사이의 불연속성과 그 의미.’ 왜 16세기까지 앞선 문물을 갖고도 동양이 서양의 지배를 받게 됐는지, 왜 조선이 서양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 침략당하고 종속당했는지가 궁금했다. 중국 역사를 통시적으로 관철하겠다는 그의 야심찬 의도에 지도교수는 아연실색했다. 석사논문이니 주제를 좁힐 것을 요구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철학과 역사에 빠져 지낸 4년이 논문의 지적 토대가 됐다.

“중국 역사를 통해 통일한국을 위한 대안을 찾고 싶었어요. 북한을 이해하려면 김일성 저작을 읽어봐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모택동과 장개석의 갈등을 거쳐 중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통일을 이뤘는지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보안검열 사건, 현실정치에 뛰어든 직접적 계기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공군사관학교 교관 시험을 봤다. 워낙 ‘화끈한’ 걸 좋아해 육군에 가려했지만 나이도 있으니 경력도 살리는 게 좋겠다는 선배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는 사관생도들에게 정치학을 가르치는 교관이 됐다. 공사는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5공화국 시절이었지만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사건은 전역 6개월여를 앞두고 터졌다. 그가 공사 신문에 쓴 시사평론이 보안검열에서 문제가 된 것. 그렇지 않아도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조치를 앞두고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라고 전 군에 지시한 상황이었다. 그가 쓴 글은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등 형식 논리만 국민들에게 주입시켜서는 체제가 강화되지 않는다.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국민이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해야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공군 보안부대는 그의 전출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교관을 그만둘 수 없으니 정식 재판에 회부하라며 버텼다. 그랬더니 생도 교육을 중지시키는 선에서 합의를 종용했다. 가르치는 일은 하지 말고 개인 공부나 마음대로 하다 제대하라는 것. 당시 단기장교 대표를 맡고 있던 그는 동료 교관들과 협의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군 생활 마지막 6개월은 방에 처박혀 책이나 읽으며 지냈다. ‘내가 교수로서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나 철학을 가르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유학을 다녀와 교수로서 안정된 삶을 살라는 지도교수의 권유를 뿌리쳤다. “보안검열은 공부할 사람은 많지만 이 시대의 정치를 바로잡을 사람은 많지 않다고 느끼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좀 더 빨리 현실정치에 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87년 7월 전역 후, 서강대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마쳤다. 약속 돼 있던 강의스케줄이었다. 그리고는 손에서 분필을 내려놨다.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지를 생각해야 했다. 1988년 5공 청문회가 한창이었다. ‘스타 노무현’을 텔레비전에서 처음 봤다. ‘저런 분이라면 함께 정치를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보좌관 등 참모로서 정치를 시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중앙당에 가서 현실정치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정통’이라고 믿었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과의 운명적 만남

문을 열심히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공채 응시도 해봤는데 떨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야당은 신뢰를 굉장히 중요하게 봤다고 하더군요. 누구의 추천이냐가 중요했던 거죠. 선배들도 추천을 받으라고 조언을 했어요.” 얼렁뚱땅 2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찬스가 왔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창당하자, 이에 반대한 노무현, 이기택, 박찬종, 홍사덕, 이철 등 8인의 청문회 스타들이 ‘꼬마민주당’을 만든 것. 그는 무작정 당사를 찾아가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며칠이 지나 ‘노무현 의원이 만나고 싶어 한다’며 전화가 왔다. 이광재 비서관이었다. 후에 17~18대 국회의원을 거쳐 강원도지사를 지냈고, 노무현정부에서 ‘좌희정 우광재’로 통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좌희정’으로 불리던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당시 이철 의원 비서관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꼬마민주당의 기획조정실장을 맡고 있었다. 꼬마민주당의 진로 등을 소재로 노 의원과 한 시간가량 얘기를 나눴다. 그가 비로소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꼬마민주당 기획조정실에서 일했다. 다시 3개월여가 지난 뒤 당에서 첫 공채를 했다. 그는 학생 운동하던 ‘쟁쟁한’ 동료들과 함께 공채 1기로 꼬마민주당에 재 입성했다. 그의 보직은 기획조정실 전문위원이었다.

정권창출 위해 고향 서천으로 낙향하다

그의 중앙당직자 시절은 만만치만은 않았다. 대부분이 학생운동권 출신인 ‘나이 어린’ 동료들 입장에서는 대학원까지 나온 그를 미덥지 않게 봤다.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꿀릴게’ 없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했다. 치열한 논쟁을 치르면서 1년여가 지나니 ‘후배’들도 그를 인정하고,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가 이끄는 평민당과 꼬마민주당의 통합이 추진됐다. 그는 야권통합 실무추진위원으로 이 과정에 참여했다.

막상 당 대 당 통합은 이뤘지만 당의 체질개편이 화두로 떠올랐다. 평민당은 철저히 DJ 1인 중심의 시스템이었다. 반면 집단지도체제인 꼬마민주당은 자유분방한 측면이 강했다. 물리적 결합은 이뤘지만 화학적으로 섞이기 어려웠던 것. 당 개혁을 위해 청년들이 의기투합했다. 당직자, 시구의원, 보좌진, 시민활동가들이 뜻을 모아 민주청년회를 결성했다. 그가 초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천호선(정의당 대표, 전 노무현대통령 비서실 홍보수석), 정태근(새누리당 성북구갑 당협위원장, 18대 국회의원), 고진화(17대 국회의원) 등이 운영위원이었다.

민주당 개혁을 위해 1년여 간 토론회,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당내 개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수권을 위해서는 농촌은 여당이, 도시는 야당이 강세를 보이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도 농촌 열세를 바꾸지 않는 한 수권정당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민주청년회가 내건 구호가 “고향에 가서 고향을 바꾸자”였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충남 서천지구당위원장을 자원했다.

30대 초반의 그는 제1야당의 지구당위원장을 꿰차고 야심만만하게 고향에 내려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찮다’는 반응이었다. 당시 충남에서는 자민련이 1당, 신한국당이 2당이었다. 통합민주당은 3당에 불과했고, ‘빨갱이 당, 전라도 당’ 취급을 받았다. “젊은 친구가 뜻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역구를 도시로 옮기든 당을 바꾸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조차 시골선거는 돈이 많이 든다며 걱정하셨어요.” 세상을, 정치를 바꾸겠다는 젊은 열정 가득한 그의 귀에 이런 얘기가 들릴 턱없었다.

두 차례 총선 낙마, 야인으로 산 10년 세월

그의 야인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서천에서 민주당 명찰을 달고 국회의원 되는 것은 바위에 꽃을 피우는 것만큼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도 그는 지역주의 선거, 돈 선거 타파라는 대의가 통하리라 믿었다. 남들 밥 살 때 그는 논밭에서 새참을 얻어먹으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저에게 밥 사라는 젊은 사람은 없었어요. 간혹 어르신들 만나면 자장면 한 그릇 정도는 대접했지요.”

돈이 떨어지면 국회의원, 민주청년회 동료, 중앙당 인맥의 도움을 받았다. 2~3일 서울에 올라가 후원금 걷어 2주가량 고향 곳곳을 누비는 식이었다. 10년을 이렇게 살았다. “선후배들의 애정과 뒷받침이 없었다면 10년 동안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돌파해내야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버텼습니다.”

몇 차례 무전여행을 다닌 경험도 내성을 키워줬다. 가진 게 없어도 사람을 편하게 만날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한 애정도 더 진하게 느꼈다. 낙선해도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5일장에 나와 인사하고 다니면 ‘이긴 사람도 안 오는데 떨어지고도 나오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들 했다. 그가 인사하면 손을 잡고 울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첫 총선 출정은 1996년 15대 총선이었다. 서천 단일 선거구였다. 사전 여론조사에서 생각보다 지지율이 높게 나왔다. 한 번 해볼 만한 승부가 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선거를 몇 개월여 앞두고 DJ가 정계은퇴를 번복, 대선출마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명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민주당 잔류를 선택했다. 국민회의는 후보를 내지 않았지만, 야권 분열로 인해 민주당은 김빠진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낙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민주당 공채 1기 동기인 이강래 선배에게서 러브콜이 왔다. 이강래는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영국유학을 떠날 때도 비서로 동행했던 인물. 그는 ‘DJ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기획팀에서 함께 일하자’는 선배의 제안을 뿌리쳤다. 야권 분열 반대와 지역주의 극복을 주창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떠날 수 없었다. 통추는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이철, 원혜영, 이미경, 제정구, 김부겸, 홍사덕, 김원웅 등이 회원으로 있었다. 15대 총선에서 대부분 낙선하면서 정치적 시련을 겪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곧 통추는 양분됐다. 대안은 DJ뿐이라는 쪽은 국민회의로, DJ는 안 된다며 ‘창(昌, 이회창 전 신한국당 총재)을 선택한 쪽은 신한국당으로 갔다. 그도 자연스럽게 국민회의 당적을 갖게 됐다. 합류가 늦어지면서 지구당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위원장으로 앉아 있었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1997년 대선에서 대통령선거 찬조 연설을 맡은 파랑새유세단의 수도권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의원이 이 유세단의 단장이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는 이뤘지만 그는 다시 ’찬밥‘ 신세가 됐다.

2000년 16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선거구가 보령과 합쳐졌다. 자민련 이긍규 의원이 서천, 김용환 의원이 보령 현역이었다. 김 의원이 자민련을 탈당, 희망의 한국신당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김 의원의 탈당으로 지구당위원장이 공석이 되자 김명수 씨(전 민주평통 사무총장)를 직무대행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민주당이 김 의원을 잡겠다며 김 씨를 전략 공천키로 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지역에서 당에 헌신해왔는데, 퇴각할 명분도 주지 않더군요. 더구나 남의 당 사람을 끌어와 선거를 치르겠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운 따른 43세 서천군수 당선, 일로 승부해 내리 3선까지

2002년 제3회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쉽겠지만 군수에 출마해 보라’는 지역민들의 권유가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이광재가 그를 호출했다. 중앙당에 올라와 ‘노무현 대통령’을 함께 만들자고 했다. 지방선거와 대선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출마해 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대선은 그 때 합류해도 늦지 않는다.’ 이광재가 그의 용기를 북돋웠다.

선거는 당초 3파전이었다. 3선에 도전하는 자민련 후보와 도의회 부의장 출신 한나라당 후보, 그리고 민주당에서 그가 선수로 나왔다. 그런데 민주당 경선 결과에 불복한 도의원 출신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4파전이 됐다. 선거구도가 바뀐 건 그에게 천행이었다. 3명의 60대 후보와 1명의 40대 후보가 경쟁을 하다 보니 젊고 개혁적 성향의 표가 그에게 쏠렸다. 1대 다자구도였던 셈이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충남 15명의 기초단체장 중 2명을 배출했다. 그가 그중 하나였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는 군수가 되면서 일로 승부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천했다. 그가 내리 3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는 군수 취임이후 6개월 간 공무원 인사를 하지 않았다. 공무원들을 접하고 소통한 뒤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자리를 주겠다는 취지에서다. “선거 때 누구를 밀었느니 하는 소리가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군수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서천군은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죠.”

그 다음 그가 할 일은 목표와 비전 제시였다. “제가 처음 군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서천이 낙후됐기 때문일 겁니다. 장항국가산업단지만 개발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된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이럴 거면 젊은 친구 한 번 기회나 줘보자는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오히려 서천의 낙후성을 장점으로 봤다. 친환경과 개발을 조화시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서천이란 얘기다. 이런 구상을 구체화시킨 것이 ‘어매니티 서천’이었다.

국립생태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장항생태산업단지로 ‘어매니티 서천’의 시작을 알렸다. 장항산단을 둘러싼 중앙정부와의 갈등 끝에 찾아낸 해법이었다.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은 이미 완공됐고, 생태산단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생태관광, 생태연구, 그리고 이를 산업화시키는 선순환구조를 만든다는 게 목표였다. “연구소와 특수대학 및 대학원, 생태산업, 바이오산업을 유치해서 서천을 새로운 생태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우리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정치, 동시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유효한 방법

그는 정치가 동시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란 믿음을 실천해왔다. 이는 복지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주민들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게 지자체의 역할이라고 봤다. 야인생활 10년 동안 독거노인, 노인성 치매로 고통을 겪는 환자와 가족들을 만난 것도 배경이 됐다.

그는 곧장 공립노인전문병원 건립에 착수했다. 그러나 벽에 부딪쳤다. 공립으로 하려니 중앙정부가, 도립으로 하려니 충남도가 제동을 걸었다. 그래서 군립으로 지었다. 노인병원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겠다 싶어 노인복지관, 노인요양시설을 지었고, 장애인복지관, 장애인 보호작업장도 만들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를 설득해 노인 전용 아파트를 국내 처음으로 건설했다. 노인 운동시설인 파크골프장, 게이트볼장도 추가 조성했다. 이 모든 시설이 한 데 모여 ‘어매니티 복지마을’이 됐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모든 읍면에 어려운 이웃을 케어(care)할 수 있는 후원회 조직을 만들었다. 어르신들이 농한기 교양‧건강 프로그램,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거점이 하나씩 모든 읍면에 들어섰다. ‘어매니티 노인건강교실’이다. 마을마다 있는 경로당에도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간호사들이 건강 체크를 해준다. 군 단위에서 시작해 읍면 단위, 마을 단위로 사회복지망이 촘촘하게 좁혀졌다.

노인 일자리도 목표치인 1000개를 채웠다. 한산모시가 대표적 사례다. 채산성이 안 맞아 모시 삼기, 모시 짜기 등을 하는 할머니들이 손을 놓는 일이 많았다. 전국적인 특산품인 한산모시의 기술 사장이 우려됐던 것. 이에 따라 서천군은 조합을 통한 구매와 이를 통한 모시피 및 모시옷 생산‧판매가 연계되도록 했다. 2007년 지정된 한산모시산업특구는 전국적으로도 우수특구로 통한다. “복지를 놓고 무상이냐 유상이냐 하는 논쟁은 본질을 벗어난 겁니다. 복지는 단순한 시혜가 아니니까요. 복지는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존엄하게, 사람답게 사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방법을 찾는 게 정치와 행정의 목표가 돼야겠죠.”

전국이 따라하는 ‘100원 택시’, 혁신의 아이콘

서천군이 돈이 많아 전국이 앞 다퉈 벤치마킹하는 도시가 된 게 아니다. 재원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일의 결과에 따라 돈의 효용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고 봐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주느냐에 따라 효용이 달라집니다. 예산의 효용성을 높이는 것이 정치와 행정의 행위인 것이죠. 돈을 쓰는 방법은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전국이 따라하는 ‘100원 택시’도 돈의 효용을 높인 지방자치 혁신 모델 중 하나다. 그는 “교통혁신 1단계‘로 ’100원 택시‘를 도입했다"고 했다. 서민의 발인 시내버스 파업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버스회사들은 예산 지원만 요구했다. 그래서 노사정 경영분석을 제안했다. 같이 돈을 세보고 수입지출 따져봐서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하지 머리를 맞댔다. 경영합리화 외에 답이 없었다. 버스대수를 줄였다.

문제는 오지마을 교통편의. 마침 택시업계도 경영이 어려우니 택시를 투입키로 했다. 비용분석을 해보니 버스의 1/3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법이 가로막았다. 택시는 대중교통이 아니어서 예산지원이 불가능했던 것. 자칫하면 선심성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대중교통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공직선거법 세 가지가 한꺼번에 물려있었다. 법이 가로막았지만 ‘지방자치법’으로 이를 돌파할 수 있었다. 주민복지 증진 조항을 찾아낸 것. 서천군은 법제처의 법해석을 받아 결국 ‘희망택시’를 도입할 수 있었다. 그는 2, 3단계 교통혁신인 공영버스 도입과 시티투어가 가능할 정도의 도로교통망 정비계획을 추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정치인생 35년, 다시 도전에 나서다

‘봄의 마을’도 행정혁신 사례로 꼽힌다. 재래시장이 이전한 자리에 조성한 문화거점이다.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찾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조명 받고 있는 곳이다. 종합교육센터, 여성문화센터, 청소년문화센터, 일자리종합센터, 친환경농산물판매장과 일부 상가가 결합돼 있다. 중앙에는 널찍한 광장이 있어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 장항에는 미디어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서천 쌀의 위상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생태도시답게 친환경 쌀을 10%까지 확대했다. 정미소에는 전국 최초로 친환경 도정라인을 따로 만들었다. 친환경인증은 20㏊ 이상인 곳으로 제한했다. 면적이 작은 곳은 옆에서 농약을 뿌려대면 소용이 없는 노릇 이어서다. 이도 전국 최초다. 이런 노력 끝에 서천 쌀은 서울시 공모 친환경 쌀 학교급식에 선정됐고, 수도권 여러 도시로 확산됐다. 충남도가 수출하는 쌀의 50%가 서천 농산물 공동브랜드인 ‘서래야’ 쌀이다.

민선 3,4,5기 서천군수. 무려 12년의 세월이다. 이제 그가 더 큰 정치에 도전하려 한다. 경선을 거쳐 충남도당위원장을 맡은 것은 그 첫 걸음이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현역 국회의원이 있는 데도 원외 인사가 시·도당위원장인 경우는 충남과 부산뿐이다.
 
“저에게 정치란 보다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만 행복하게 살 게 아니라 미래의 세대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발전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 사회시스템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가 30년 이상을 변함없이 꿈꾸고 지방자치 혁신을 통해 실천했던 정치의 이상이다. 그가 이제 더 큰 정치를 하려 한다.

나소열은 1959년 5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서천중, 공주사대부고를 나왔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하고 전통 중국과 현대 중국의 이데올로기 단절을 분석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꼬마민주당 공채 1기로 정치에 입문, 당시 기획조정실장이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보조를 맞췄다.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을 위한 통합실무위원, 당 개혁을 위해 조직한 민주청년회 초대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김대중대통령 후보의 선거유세를 지원하는 수도권 파랑새유세단 부단장, 새정치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 특별보좌역, 새천년민주당 노무현대통령후보 정무보좌역을 지냈다.

두 차례 치른 총선에서 실패한 뒤 지방선거에 출마, 민선 3,4,5기 서천군수을 역임했다. 지난 1월 경선을 거쳐 새정치민주연합 충남도당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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