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양사언 (148)청주양씨(淸州楊氏)

청주양씨(淸州楊氏)

조선 전기의 4대명필(四大名筆) 양사언(楊士彦)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논산시 상월면 공주고-서울대 출신 청주양씨 양순직 3 형제"

제3회 뿌리문화 축제 장면 -대전 중구 뿌리공원

 

   
 대전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 호수

양씨(楊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시조인 양기(楊起:시호 충헌)는 원나라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때는 종2품 품계로 후에 광정대부로 바뀌고 정2품으로 격상됨)로 중서성(中書省)의 정승(政丞:다른 기록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명칭이 변경된 도첨의부의 시중을 지냈다고 함)으로 있을때인 1349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공민왕비)와 결혼한 고려태자 령전(공민왕)이 왕위에 즉위차 1351년12월 25일(고려사 권38.2) 환국할 때, 노빈도령(魯嬪都令)으로 공주를 배종(陪從:지체 높은 사람을 모시고 따라감)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한편 청주양씨(淸州楊氏) 대종회 기록에는 시조인 충헌공(忠憲公) 양기(楊起)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서기 1351년 12월 25일로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고려 충정왕(忠定王) 3년이 정설이며, 지금(2011년 기준)으로부터 약 660여년 전이라고 한다. 시조 양기는 개경에 41년간 정주(定住)하다가, 1392년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그의 일족이 한양으로 옮겨 왔으나, 2세인 아들 6형제 중 일부는 잔류했다고 한다.

시조 양기(楊起,호는 암곡 巖谷)는 고려에 들어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백관을 통솔하던 종1품 정승으로 1362년(공민왕 11)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면서 문하시중이 첨의정승으로 바뀜)에 올랐으며, 만백성의 적폐(積弊)였던 세공(稅貢:전세(田稅)와 공부(貢賦) 등, 고려때 부세(賦稅)의 포괄적인 의미이며, 동녀 5천인,준마 3만필,비단 3만동,저포 6만필 등)을 삭감하여, 그 공훈으로 나라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때 정1품 품계)의 품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1품 품계)로 상당백(上黨伯:상당은 지금의 청주 백은 오등봉작 중 세번째 작)에 봉해져, 본관을 청주로 하여 청주양씨(淸州楊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에 올라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394年 92세로 천수를 누리다 서거하여 나라에서는 그에게 시호(諡號)를 충헌(忠憲)으로 내렸다.

조선시대에 청주양씨는 서기1455년(단종3)까지 63년간 큰 치적을 쌓아가고 있었으나, 이른바 단종 선위(端宗禪位)의 상잔으로 기억된 을해난(乙亥亂)의 회오리 속에 충헌공의 현손 혜빈양씨(惠嬪楊氏)가 연루되어, 당사자가 참형(斬刑)됨은 물론 일족이 서울을 뒤로 하고 전국으로 이산하는 비운을 맞게 되며, 대부분의 후손이 경기 황해도를 중심으로 세거 하였다고 한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계기로, 씨족 대이동을 겪어 남ㆍ북 각지에 이주를 하게 되었으며, 세거지 별로 남.북에 6대 4정도의 비율로 산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혜빈양씨(惠嬪楊氏,?~1455년 11월9일,또는 1464년)의 아버지는 양경(楊景)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후(楊厚)가 혜빈양씨의 숙부이다. 세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1414년(세종 23)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동궁인 노산군[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자 세종은 혜빈 양씨를 택하여 어린 동궁을 보살피게 하였다. 이에 혜빈 양씨는 정성을 다해 단종을 보살폈고 이러한 지극 정성은 단종의 성덕(聖德)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455년(단종 3) 혜빈 양씨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옥쇄를 거두려고 하자 “옥쇄는 국왕의 중보(重寶)이다. 선왕의 유훈(遺訓)에 ‘세자와 세손이 아니고는 전할 바가 아니라’ 했기에 비록 내가 죽더라도 내놓지 못하리라”고 훈유(訓喩)하여 말하다가 그날로 죽음을 당했다.

혜빈 양씨의 3남인 영풍군(永豊君) 이전(李?)도 운검(雲劒)을 갖고 입시하다 동시에 죽음을 당했다. 1남인 한남군(漢南君) 이어(李王於)는 경상남도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 3) 금성군(錦城君)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화를 입고 적소에서 병사하였다.

왕이 죽으면 후궁은 궐을 나가야 했다. 그러나 혜빈양씨(惠嬪楊氏)는 어린 단종을 보육(保育)하였기 때문에, 세종의 사후에도 궐내에서 생활하였다.

단종 즉위 후, 혜빈양씨(惠嬪楊氏)는 단종에게 은밀하게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서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방룡 소흥(旁龍所興)의 땅에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1455년 단종의 선위에 의해 세조가 즉위하자 혜빈양씨는 청풍(淸風)으로 유배되고 가산도 적몰되었고, 1455년 11월 9일 대신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상소에 따라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소생으로는 한남군(漢南君) 이어(1429~1459년),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 영풍군(永豊君) 이천(李?)이 있다.

1713년(숙종 39)에 혜빈 양씨의 묘를 봉하려 했으나 묘 자리를 잃어버려 정하지 못하고 부조묘(不?廟)를 명하였으며, 1791년(정조 15)에 민정(愍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충청북도 충주시 용관동에 사당이 있다.

한편 시조 양기(楊起)의 아들 양지수(楊之壽)는 광정대부(匡靖大夫:종2품 품계 고려 말에는 정2품으로 격상됨)의 품계로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정2품 부총리)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손자 양백연(楊伯淵)은 동강 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와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왜구를 격퇴하고 찬성사(贊成事:고려 문하부의 정2품부총리)가 되어 정방제조(政房提調:정방은 고려때 정무를 집행하던곳으로 제조는 정2품관이 맡아보는 벼슬)를 겸했다.

증손인 양영수(楊英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정령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정3품)와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의 무신(武臣)으로 무예에 뛰어났던 양정(楊汀)은 세조때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양산군(楊山君)에 봉해졌고, 공조판서(工曹判書:공조는 산택(山澤).공장(工匠).영조(營造)등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관아 수부(水府)라고 함 정2품 장관)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원의 2품)를 거쳐,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양계(兩界)지역의 장관으로1389년(공양왕1) 종래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이 이름으로 고쳐 대체로 재추(宰樞)로서 이 직을 맡도록 하였음)에 이르렀다.

또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한석봉)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4대명필(四大名筆)로 일컬어졌던 양사언(楊士彦)은 청주양씨(淸州楊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명종때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병년에 실시하던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강릉부사(府使:정3품수령)와 함흥부윤(府尹:종2품지방장관)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양사언 초서>

봉래 양사언 (楊士彦 1517∼1584,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 海客)은 조선 중기에 한석봉과 함께 같은 시기를 살다 간 명필가이자 선정을 베풀면서 여덟 고을을 다스린 선비이다. 또한 단 한 수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면서도, 읽거나 외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용기를 북돋는 내용으로서 만인에게 회자되는 글이다. 그래서, 봉래 양사언은 명필가이면서 한 수의 시조로서 그 이름이 드높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병과로 급제,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종6품).평창군수(平昌郡守,종4품).강릉부사(江陵府使,정3품 수령).함흥부사(정3품수령) ·철원군수.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安邊)군수로 재임 중 지릉(智陵)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위의 사진은 삼척의 무릉계곡 너럭바위에 남아 있는 옥호거사(玉壺居士) 양사언의 휘호 암각문.‘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의 열 두 글자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삼척시에서는 화강암에 모사(模寫)품을 제작하여 진품 현장으로부터 약 40m 거리의 길가에 노천 전시중이다.>

양사준(楊士俊,?~?,자는 응거(應擧),호는 풍고 楓皐)은 돈령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고,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의 형이다. 1540년(중종 35) 사마시에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546년(명종 1)에는 증광문과(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때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 때 김경석(金慶錫)의 종사관이 되어 영암에서 왜구와 싸웠다. 이때의 경험으로 가사 남정가(南征歌)를 지었는데, 남판윤유사(南判尹遺事)에 실려 전한다. 1557년 평양서윤(庶尹,종4품 서기관.평양시청 국장)을 지내고, 1563년(명종 18) 간성군수(종4품수령)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동생 양사언.양사기와 더불어 당대에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 소순.소식.소철)에 비교되었다.

양사기(楊士奇,?~?,자는 응우(應遇), 호는 죽재竹齋)는  돈령주부(敦寧主簿,6품 주무관)를 지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고,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의 동생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와 진사시(進士試,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 있을때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호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원주.부평 등 일곱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높았다. 선조가 즉위한 후에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올렸으나, 선조가 소홀히 들은 탓에 훗날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국토가 유린당하였다. 자기가 죽을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예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형(兄) 양사언과 함께 시(詩)에 뛰어났다.

                                                   양희수.양사언 야사(野史)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를 읽는 이유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 속에 은근슬쩍 드러나는 그 시대의 맨 얼굴을 엿보는 재미 때문이다.

10여년간 홀아비로 지내며 산천유람을 하던 단정한 선비 양희수는 함경도 안변지방을 지나다 우연히 농사꾼의 집에 들른다. 혼자 집을 지키던 열세살짜리 어여쁜 낭자가 뜻밖에 정갈한 솜씨로 식사대접을 하자 감탄한 양희수는 청홍 부채 두자루를 주며 "이 쥘부채를 너에게 채단(혼례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주는 청홍비단)으로 주려는데 받겠느냐?"하고 농담을 건넨다.

2년 뒤 소녀의 아비가 양희수를 찾아와 딸이 폐백을 받았으니 정혼한 것과 다름없다고 고집하며 양희수의 소실되기를 자청한다고 말한다.

양희수의 소실로 들어온 안변 낭자는 슬기롭게 집안을 꾸려나갔고 아들 둘을 잇따라 낳으니 이 중 한 명이 조선의 명필이 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다. 안변 낭자는 양희수가 병으로 죽자 관(棺)앞에서 자결하면서 문중 어른들에게 적서차별을 없애 달라고 간청, 양사언은 문과에 나가 급제했고 세상 사람들은 양사언이 서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선말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살면서 매일신보 기자를 지낸 지식인 송순기(宋淳夔ㆍ1892~1927)가 쓴 '기인기사록(奇人奇事錄)'은 조선시대 별난사람들의 별난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지나치게 터무니없거나 말초적이어서 읽고나면 남는 것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기인기사록의 장점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꼬장꼬장하게 살다간 선비, 재주가 출중한 서민들, 고운 마음씨로 주변을 울린 사람, 21세기 로맨틱 코미디를 뺨치는 근사한 연애를 이끌어낸 여인 등의 이야기를 구수한 문장으로 엮어낸 솜씨가 일품이다.

기인기사록은 1920년대 송순기가 매일신보에 연재하던 것을 1921년 상권, 1923년 하권으로 묶어 총 107가지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고교 교사를 거쳐 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국문학자 간호윤(47)씨가 낸 '기인기사'(푸른역사 펴냄)는 기인기사록 중 24가지 이야기를 번역하고 요즘 사람들이 읽기 쉽게 매만진 책이다.<편집자 주>

이 외에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양응춘(楊應春)과 호종공신(扈從功臣:왕을 수행한 공신)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내고 홍농군(弘農君)에 봉해진 양순민(楊舜民)과 서예에 뛰어났던 양만고(楊萬古) 등이 청주 양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양춘건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청주양씨>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는 청주양씨, 함평이씨, 전주이씨세 집안이 살고 있는데, 이 중 청주양씨는 주곡리의 터줏대감이라 불릴 만큼 오랜 세월 세거해 왔다. 1920년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의 성(朝鮮の姓)에 따르면, 1920년대 논산의 동족마을에 대한 자료에서 청주양씨가 상월면 주곡리에 동족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때에는 상월면 지경리에도 청주양씨 동족마을이 있었는데, 당시 주곡리와 지경리에 세거하던 청주양씨는 43가구나 되었다.

  상월면 지경리에서 본 계룡산 주내삼거리  
상월면 지경리에서 본 계룡산 주내삼거리

청주양씨시조 충헌공 양기(楊起)는 원나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종1품정승)으로 고려 충선왕때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여 우리나라에 왔다가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 돌아가 조공제도를 폐지하도록 힘썼다. 이후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상당백의 작위를 받고 청주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청주양씨는 처음 개경에서 정주하다가, 조선 건국과 더불어 한양으로 옮겨 왔으나 2세인 아들 6형제 중 일부는 잔류했다.

조선 건국 후 1455년(단종 3)까지 치적을 쌓았으나 단종복위에 충헌공의 현손 혜빈양씨(惠嬪楊氏)가 연루되어 당사자가 참형됨은 물론 일족이 수도를 뒤로하고 8도(八道)로 흩어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후손이 경기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세거하였는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남북 각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세거지 별로 남북에 6대 4 정도의 비율로 산재해 살고 있으며, 약 5만 여 명으로 추산된다.청주양씨는 처음 개경에 정주하였으며, 한양 천도 후 8세까지 세거하다가 중종연간(1506~1544년)에 9세손으로 첨정(僉正:정3품(正三品) 당하아문(堂下衙門) 중 시(寺).원(院).감(監) 등의 관아에 속한 종4품 서기관)을 지낸 양춘건(楊春健)이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숯골에 정착하여 종가(宗家)를 이루었다.

청주양씨는 서원백파.정승공파.전서공파.서평군파.밀성군파.당악군파로 나뉘는데,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살고 있는 청주양씨는 <서원백파>이다. 현재 주곡리에 거주하는 60가구 중 30가구 이상이 청주양씨이며, 상월면에도 넓게 분포하고 있다. 청주양씨 서원백파 후손들은 상월면외에도 개성, 해주, 숙천, 이천, 평원, 대구, 밀양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충헌사 전경  
충헌사 전경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69번지에 충헌사(忠憲祠)가 있는데, 충헌사는 1626년(인조 4)에 세운 사당으로 양기(楊起).양치(楊治).양희지(楊熙止).양응춘(楊應春).양훤(楊喧)을 모셨으며,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충헌사는 2007년 4월 12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주곡리마을 입구 장승배기에서는 매년 정월 14일 저녁에 장승제를 지내는데, 그 유래가 양춘건이 숯골로 입향한 후 마을의 화합을 위해 지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충헌사 홍살문  
충헌사 홍살문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 공주고 출신 청주양씨 3형제>

국립공원 계룡산아래 넓게 펼쳐진 마을인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 출신 <양씨 3형제>가 유명하다.

3형제중 큰 형인 양순직(1925~2008년)은 공주고와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해군소위로 임관 1961년 해군중령으로 예편했다. 서울신문사장을 거쳐 중앙정보부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다선의 공화당.신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0년대에는 김대중 전대통령과 함께 평민당 창당을 주도했다.동생인 양봉직은 1928년생으로 공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법대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6기 출신으로 6.25전쟁때 <다부동전투>의 중대장으로 유명한 전투 일화를 남겼으며, 논산훈련소장을 거쳐 1군단장으로 재직 중 진종채.이희성 등의 견제로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고,반야심경을 발췌독서하고 불교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표지석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표지석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양순직의 또 다른 동생인 양인직도 공주고를 거쳐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에 경천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들 3형제는 5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근대화.산업화시기에 각 분야에서 주름잡던 인물들로 유명하다.특히 이들 3형제 출신 마을 지경리는 1970년대초 <새마을운동>이 한참 진행중일때 전국 최초로 <새마을운동 모범마을>에 선정되기도 했다.

   
 

 <상월면 지경리에서 본 주내 4거리와 계룡산 전경>

                               <제1군단장 양봉직 중장 축출 음모 사건>

박정희와 군부(軍部)를 논할때 부정적으로 크게 인식된 사건이 "윤필용 사건",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정치군인 사건", 전두환 등 하나회 사조직에 의한 1979년 12월12일의 "12.12 군사반란 사건" 등을 말하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양봉직 제1군단장 축출사건"이다.

1976년 수도권 북방 방위책임을 맡고 있던 제1군단은 양봉직 중장이 군단장이었다. 당시 군단장의 친형이 양순직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는데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하고 나서자 박정희의 눈 밖에 났다. 이에 착안한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제1군단장 양봉직 축출을 구상했다. 당시 육사 8기생 군단장은 충청도 출신의 이재전과 강원도 출신의 이범준이었기 때문에 영남권 8기생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군단장은 군사령관과 참모총장으로 이어지는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직인데, 충청도 출신으로  강직하고 청렴한 양봉직 장군이 있는 한  8기생 영남 출신은 자칫 전멸할 수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따라서 진종채와 이희성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양봉직 제1군단장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이희성이 가고 진종채는 사단급인 보안사령부를 군단급으로 격상하면 영남권 두 군단장급이 만들어진다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강직하고 그 낌새를 알고 있던 양봉직 장군이 약점을 노출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진종채는 최후 방책으로 양봉직 군단장이 방위성금을 착복했다고 박정희에 허위보고해 단 하루 만에 제1군단장을 교체했다. 진종채는 보안사령부를 육?해?공군을 통합해 군단급으로 격상시켜 중장이 되었고, 이희성은 제1군단장에 취임함으로써 두 명의 8기생 군단장을 탄생시켰다. 이 사건은 이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의 후원과 격려로 전두환 등에 의한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여 군사정권이 만들어졌고,이희성은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

불과 200여명의 정치군인들이 대한민국 국군에 흙탕물을 끼얹고 있었을지라도 거의 모든 장병들은 그 굴욕을 참으면서 임무수행을 했다. 현재는 이런 정치군인이 없다고 보아진다.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왜냐하면 하나회와 같은 사리사욕 집단은 전근대적 조직이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세기에 있어서 원시적 사조직이 필요할 까닭이 없다. 군부의 오욕을 훨훨 털고 새 세기를 향하고 있는 오늘의 군부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내야 한다. 박정희 시대 군부의 오점은 역사적 교훈으로 항상 잊지 않고 있을 때 그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예비역 육군 준장, 한국 군사평론가협회 회장, 시인(詩人) 글 보완>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안내판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안내문
  양봉직 장군 묘비  
양봉직 장군 묘비
  양봉직 장군 행장  
양봉직 장군 행장

 <육군 중장으로 논산훈련소장.1군단장을 지낸 양봉직 묘-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양순직의 또다른 동생인 양인직도 공주고를 거쳐 계룡산 주변인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423번지에 1969년 6월26일 학교법인 양지학원의 설립인가를 받고 경천중학교를 설립하여 1969년 12학급을 인가받아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경천중학교는 전통의 명문고교인 공주고 전체수석 등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주곡리 마을입구 장승  
주곡리 마을입구 장승


<주곡리 마을입구 장승>

주곡리 장승제는 양춘건이 숯골로 입향한 후 마을의 화합을 위해 지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주곡리 마을 안내문  
주곡리 마을 입구 장승제 안내문



청주양씨(淸州楊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에 11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으며 무예와 병서로 시험을 보았음)에 10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4명 등 4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소재지로,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역모사건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46년에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였다.

인구조사에서 1985년에는 6,856가구 27,833명, 2000년에는 8,548가구 27,437명이었다.

<글.사진 사단법인 뿌리문화 이사장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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