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77)선산김씨(善山金氏,일선)

   
뿌리공원에 조성된 선산김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和合·發展·繁榮

조각가

신동일

작품설명

전체적으로 산(山)의 형태를 조형화 했으며, 그 위에 종중의 상징마크를 떠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善山(一善)金氏의 상징성을 표현했다. 앞면에 오석판으로 종중의 유래가 음각으로 새겨지고 뒷면에는 명판이 새겨진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선산김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선산(일선) 김씨 유래>

 선산(일선) 김씨의 시조는 순충공(順忠公) 선궁(宣弓)이며 고려때 고려 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이르러 일선(선산의 옛 이름) 백(伯)에 봉록을 받게되어 선산(일선)이 관향이 되었다.

시조 순충공의 첫 이름은 선(宣)이었으며 신라 대보공 김알지공(金閼智公)의 30세손이며 신라 46대 문성왕의 8세손, 경순왕의 삼종질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로 경북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 부근에서 태어나시었다.

고려 왕건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려고 일선군(선산)에 머물 때에 신라 김씨 왕손으로 왕건 태조를 도와 15세의 어린 나이에 자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니 왕건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친히 자기 활을 하사하시고 이름을 선궁(宣弓)이라고 내려 주셨다.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워 삼한통합익찬공신(三韓統合翊贊功臣)에 책봉되었으며 고려 정종 원년 서기 945년에 대승(大丞)으로 추증하고 순충(順忠)이라 시호하시었다.

공이 말년에 관직을 떠나 고향 선산에 낙향하시어 터를 닦고 지내면서 군 청의 청사에 대지로 사용하게 된 것이 지금도 비봉산(飛鳳山) 아래 봉하루 (鳳下樓)터와 군민이 공의 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향화를 올렸다는 진민사(鎭民祠)터가 있고 선산김씨유허비각(善山金氏遺墟碑閣)이 있어 천년이 지난 지금도 후진들의 교육의 장으로 빛나고 있다.

시조 순충공의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慶北 龜尾市 海平面 金湖里 彌石山)에 모시었으며 매년 음력 10월1일에 향사를 지낸다. 그 후 후손들이 번창하여 고려조를 지키려고 충절을 지킨 두 충신(二忠), 충개공 김제(忠介公 金濟),충정공 김주(忠貞公 金澍)와 조선조의 훌륭한 다섯 선비, 세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문정공 김효정(文靖公 金孝貞), 성리학맥을 이은 문강공 김숙자(文康公 金叔滋), 사림파의 종조로 성종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문충공 김종직(文忠公 金宗直), 중종때 좌의정, 우의정을 지낸 문대공 김응기(文戴公 金應箕), 명종, 선조때 東人의 영수 김효원(金孝元), 호조판서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로 일본을 다녀와 “해사록”을 남기고 “반계수록”을 쓴 류형원의 스승인 문강공 김세렴(文康公 金世濂)을 배출한 집안으로

 

아래와 같이 18개 종파를 이루어 지구촌 각지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여 훌륭한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善山(一善)金氏는 백암파(白巖派), 농암파(籠巖派), 문대공파(文戴公派), 간의공파(諫議公派), 화의군파(和義君派), 낭장공파(郎將公派), 취수공파(醉睡公派), 송천공파(松川公派), 성암파(省庵派), 소암파(素庵派), 곤육재파(困六齋派), 대장군파(大將軍派), 우윤공파(右尹公派), 양양공파(良襄公派), 정조공 파(正朝公派), 강호파(江湖派), 과당공파(苽堂公派), 점필재파(?畢齋派)의 18개 분파로 나뉘어 면면이 이어 내려오는 빛나고 명예로운 가문으로 동조동근(同祖同根), 세수돈목(世守敦睦)을 고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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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작가의 해설>

 

 

 

                                     선산김씨(善山金氏,일선)

                               김숙자,사림 영남학파 종조 김종직

                        김효원(동인.서인 만든 장본인) 등 대학자 배출

 선산김씨의 시조는 김선궁(金宣弓:초명은 김선金宣)이다.

시조 김선궁은 신라김씨 도시조 김알지(金閼智)의 30세손이자, 경순왕의 삼종질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로 문성왕의 8세손이다.

실제로 서기1690년에 출간된 선산김씨족보 경오보(庚午譜)에도 "김선궁은 신라 태보공(太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0세 손이자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으로 신라김씨(金氏) 왕세대(王世代)의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이다"고 나와있다.

   

  시조 김선궁 묘와 재실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김선궁(金宣弓: 시호 순충 順忠,선주백)은  선산(善山;일선 一善) 김씨(金氏)의 시조(始祖)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 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옥된 후 조정에 의해 효자라고 하여 석방되고 표창까지 받았다.

남정(南征)차 선산에 이른 태조 왕건(王建)으로부터 활을 하사받음으로써 이름을 선궁으로 고치고 그를 따라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올랐으며 정난보국공신(靖難輔國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선궁은 어렸을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의 목을 베고 조정에 처벌을 자청 투옥되었으나,

조정에서는 효자라 하여 석방시켜 오히려 표창을 하였다.

 그는 약관15세의 나이에 고려 태조의 원정군으로 종군, 태조로부터 하사된 어궁(御弓)과 함께 선궁(宣弓)이라는 이름을 사명(賜名)받고 후백제군과의 일리천(一利川)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고려 삼한통일에 기여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김선궁은 태조의 부름을 받고 개경에서 출사 길에 오른 후

왕건을 도와 후삼국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으며 정난보국공신(精難輔國功臣)에 책록되어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고려 종1품 정승으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함)에 이르고 나중에 선주백(善州伯)으로 봉해졌다.

 

 이존록(彛尊錄)을 보면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이었던 김선궁이 세상을 떠난후 큰 아들 김봉술(金奉術)이 문하시중을 습작하고 이어 그 후손들이 개경(開京)에 계속 머물러 벼슬을 하게 되자 후예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일선(一善)이라 하였다.

 

이존록(彛尊錄)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그의 가계와 부친 김숙자(金叔滋 : 1389~1456)의 전기와 행적,부친의 제자와 종유자(從遊者)가문의 제사법 등을 기록한 책이다.

   
  점필재문집책판 및 이존록(?畢齋 文集冊板 및 彛尊錄)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소재

<점필재문집>은 조선시대 영남사림학파의 영수인 김종직(1431∼1492)의 시문집 책판이다. 밀양시 시도유형문화재 
제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점필재( ?畢齋)  김종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제학,공조.이조참판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문장과 역사에 뛰어나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수를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이 문집은 1458년(세조 4)에 저술한 것을 생질 강백진(康伯珍)이 교정해 1497년(연산군 3)에 간행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간되었고 서문은 조위(曺偉)가 썼다. 첫편 보도(譜圖)는 가계(家系)이다. 먼저 부친상을 마친 후 흩어진 지파의 족보를 모아 선조 18대의 계보를 복원한 경위를 적고,복원한 선조로부터 자신에 이르는 18대의 계보도와 직계선조 14대의 사적을 기록했다.

기년(紀年)은 김숙자의 행적을 연도별로 기록한 것이다. 사우(師友)는 김숙자의 제자, 동년급제자, 생원시 동년급제자,친우,향당(鄕黨),친척의 명단 등을 나누어 수록했다. 사업(事業)은김숙자의 인물됨.학문활동.경력.선행 등 일생 동안의 주요행적을 적었다. 여기에는 세종 때의 공법(貢法)에 대한 건의,답험(踏驗) 문제에 관한 기록도 있다. 제의(祭儀)는 가문의 제사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당시 사대부가의 제의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부록으로 저자의 외조부인 박홍신(朴弘信)의 전기와 어머니 박씨의 행장을 수록했다.

 16세기 사림파의 시조로 불리는 김숙자와 김종직의 배경과 교유관계 그리고 이 시기 족보편찬 상황과 가문의식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점필재문집>은 시집이 23권, 문집 2권으로 총 25권이며, 연보, 무오사적, 문인록 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이 책판은 1789년 이관하여 현재 예림서원에 소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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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의 지명은 그 후 선주(善州).숭선(崇善) 등 몇차례 바뀌었다가 조선 태종이 국령(國令)을 내려 일선군(一善郡)을 선산부(善山府)로 개칭하고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두어 다스리게 한 후 5백여 년이 계속되면서 선산(善山)이라는 지명으로 고착되었다. 이에 따라 일선(一善)의 본관(또는 관향) 또한 선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선산김씨(善山金氏)로 하게 되었다.

 김선궁의 큰아들 김봉술도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이르러 부자(父子)가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냈다.

선산김씨는 김봉술과 삼사우윤(三司右尹;고려때 돈과 곡식의 출납회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역임한 김봉문(金奉文)의 형제대에서 세계(世系)가 나누어 졌다.

김봉술계파에서는

고려말의 절신(節臣) 김 제와 김 주,조선조의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김응기,동인(同人)의 영수 김효원,판서(判書:6조의 정2품 벼슬) 김이원,김세렴 등이 있다.

   

            김세렴 묘비명-충북 충주시 양성면 본평리

호조판서. 홍문관 제학.시호는 문강 동명 김세렴묘

배위는 정부인 문화류씨

김세렴(金世濂,1593~1646)은 본관이 선산(善山;일선)이며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22세 때 생원.진사가 되고,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1617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폐모론 주장자를 탄핵하다가 곽산에 유배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사가독서(賜暇讀書:나라에서 젊은 문신 중 재덕을 갖춘 인재들에게 호당에서 오로지 공부만하는것)를 하였다. 수찬 ·응교(應敎) 등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사간(司諫)을 거쳐 황해도관찰사에 특진되고, 안변부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근사록(近思錄),소학,성리자의(性理字義),독서록 등을 간행하였다.

김봉문계에서는 조선 성리학의 거유(巨儒) 김숙자(金叔滋)와 그의 아들이자 조선시대 대표 성리학자로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인 점필재 김종직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인물탐구>

김숙자(金叔滋:1389~1456.호는 강호산인,시호 문강)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세종 때 관직을 지내다가 세조 즉위 뒤인 1456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밀양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거유(巨儒)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종조라는 아들 김종직에게 잇도록 하여 정주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12세부터 길재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으며1414년(태종 14년)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를 거쳐 1419년(세종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식년마다보던 과거 즉 3년마다 보던 정기시험,동당 東堂)에 병과로 급제하고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시강원의 정9품 벼슬)가 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에 추증되었고 선산의 낙봉서원에 제향되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년:호는 점필재)

김숙자의 아들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1459년 문과에 급제하고 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으로 왕의 비서실장).공조참판(參判:종2품 차관).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벼슬로 법무부 장관).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2품 벼슬)를 지냈다.

아버지인 김숙자의 정주학을 이어받아 크게 중흥시켰으며 사림의 영수이자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 추앙받았다.

문장과 경술에 뛰어났으며 야은 길재의 학통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년) 류자광.이극돈 등의 모함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1498년(연산군 4)류자광 등의 훈구파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에 대해 일으킨 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어 억울하게 부관참시를 당했으며,김일손 등 많은 제자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정몽주.길재 및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전수받은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이를 높이 평가하였던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하였는데, 이와같은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이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의제 義帝)을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정축년(丁丑年)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을 잤다.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 의제) 손심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회왕은 중국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으로 거리가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데 꿈에 나타난 징조는 무엇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는 기록이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야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 - (연산군 일기 4년 7월 17일)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였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다. <백과사전>

 김효원(金孝元:1542~1590년.호는 성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말기부터 선조 초에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관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붕당을 만든 장본인으로 비난도 받고 있지만 청렴결백한 선비로서 신진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호당(湖堂:조선 때 재덕을 갖춘 젊은 문신을 뽑아 사가하여 오로지 장의사에서 공부만 하도록 한곳으로 독서당)에 들었으며 성리학의 5현중 한사람인 김굉필을 비롯하여 정여창,조위,남효온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그의 제자이다.

1564년(명종 19년)진사시(進士試)와 이듬해인 156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성균관에 임금이 알성한 후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좌랑(佐郞:정6품 벼슬).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 벼슬).지평(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 벼슬)을 역임했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이 격화되자 그 중심 인물을 모두 중앙에서 내보내자는 율곡 이이의 조정으로 경흥부사(府使:정3품 외관직)로 나간뒤 조정분란의 중심이 되었음을 자책하여 중앙관직에 머무르지 않고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 이조판서(判書:정2품 장관)에 추증되었으며 삼척의 경행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성암집]이 있다.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58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35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68명,역과에 14명,의과에 5명,음양과에 6명,율과에 2명,주학에 1명 등 모두 28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선산김씨는 지난 2005년의 인구조사에서  총34,422가구에 인구는 109,600 여명이었다.

한편 김추를 시조로 받드는 선산김씨(들성)도 있다.

 

                                             선산김씨(善山金氏,들성김씨)

선산김씨(善山金氏,들성김씨)는 신라왕실의 후손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제8자(子)이며 고려태조의 외손자로 상서령(尙書令:종1품으로 문하시중을 지낸사람이 맡음),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를 시조로 받들며 관향(貫鄕)을 선산(善山)으로 삼았다.

 

그리고 후대에 삼척(三陟),온양(溫陽),희천(熙川),진주(晉州), 원주(原州)로 분관(分貫)하여 계승(繼承)한다.

고려시대 선산김씨는 크게 성창(盛昌)한 명문사족(名門士族)이다. 문중의 많은 인물이 봉군(封君)되고 시호(諡號)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경 장상(公卿 將相)을 배출하여 명문대가의 반열에 올랐고 그 후예들은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고려의 융성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다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고려말엽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정5품 무관)을 지낸 16세 김문(金文)은 4형제를 두었는데 이로부터 선산김씨는 4대계파(系派)를 이룬다.

큰아들인 김성원(金成元)은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종1품)으로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파조(派祖)가 되었고, 그 아들 김기(金起)는 정순대부(正順大夫)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화의군(和義君)에 봉(封)하여졌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가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절의(節義)를 지켜 은거 종신(終身)하였다.

화의군(和義君)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으로 김광필(金匡弼), 김광보(金匡輔), 김광좌(金匡佐)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김광필(金匡弼)의 후손은 고향에서 제주로도 갈 목적으로 전라도로 떠났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을 뿐 그 후로 소식이 없고,충순위공(忠順衛)김광보(金匡輔)는 김 현(金俔),김 질(金侄),김 위(金偉),김 신(金信)의 4형제를 두어 향지(鄕地)와 충청, 전라 등지에 산거(散居)하며 충순위공파종(忠順衛公派宗)을 이루고잇다.

 

 참판(參判)김광좌(金匡佐)는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6파(派)로 나뉘어져 현재에 이른다.

이를 기점으로 화의군(和義君) 자손들은 선산(善山)을 중심으로 세거 번성하며 후손들의 유행(儒行)을 닦고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수많은 자손들이 문무(文武) 대소(大小)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관직에 등용되었으며 사대부(士大夫)의 명문으로 경향에 그 명성을 떨쳤다.


둘째 아들인 판서공파조 김성부(判書公派祖 金成富)는 고려조 전의부정(典醫副正)을 지내고 조선개국 원종공신에 책봉되어 벼슬은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장관)에 이르렀다. 태조가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이거할 때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였다가 태조가 환도(還都)할 때 복귀하지 않고 함경도 길주에 정착하였다.

 

그 아들인 김경도(金敬道)는 조산대부(朝散大夫:고려 문산계 종5품,1356년(공민왕5)에는 종4품)로 밀양교수(密陽敎授:문과 출신 관원중 전적등을 교수로 임명했으며 조선때는 종6품)를 지내고,

그 후손들은 함경도 단천 고읍을 중심으로 길주(吉州),성진(城津),이천(利川),풍산(豊山),북청(北靑),홍원(洪原) 등에 산거하며 많은 자손들이 관직에 나아가 문중을 빛냈다.

광복이후 국토의 분단으로 연락이 두절되고 남하한 2만여 종인만 연락되어 대동종친회를 중심으로 종사를 같이 수행하고 있다.

셋째 아들인 좌의정공파조 김성룡(左議正公派祖 金成龍)은 고려말에 산원동정(散員同正:산원은 고려때 중앙군2군6위정8품무관,동정은 6품이하무관에게 주던 명예직)을 지냈고 조선개국원종공신에 책봉(冊封)되어 벼슬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大匡輔國 崇綠大夫:정1품품계)로 좌의정(左議政:정1품정승))에 이르고 화의부원군(和義府院君)에 봉하여 졌다.

그의 아들 김탁(金)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당상관품계)로 병조참의(兵曹參議:정3품 국방차관보)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벼슬에 나아가 가계(家系)를 유지 계승하고 경기도 이천(利川)을 중심으로 산거(散居)하고 있다.

넷째 아들인 별장공파조 김성여(別將公派祖 金成呂)는 고려말에 별장동정(別將同正:별장은 고려때는 정7품무관벼슬,조선때는 용호영의 종2품,동정은 6품이하무관에게 주던 명예직)에 이르고 그 자손은 평안도에 세거하며 그 아들 김선(金選), 손자 김요신(金堯臣),김순신(金舜臣)이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행적(行蹟)은 알지 못하고 있다.

 

<선산김씨 집성촌>

고려말 광주(廣州) 목사(牧使:정3품 외관직)를 지낸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는 고려사직(社稷)의 운명이 다할 무렵 관직을 버리고 관향인 선산 산촌(山村)에 자리잡고 은거하여 생을 마치고 4대독신으로 외롭게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그 후 화의군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인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차관) 김광좌는 현재의 선산군 고아면 원호리와 문성동에 걸친 마을 <들성>에 정착하여 들성김씨(선산김씨의 속칭) 500년의 세거지(世居地)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 동안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들성에는 200여호의 들성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해평(海平)배내(舟內),구미(龜尾) 사창(荊谷),금릉(金陵) 조마(助馬) 숭산(崇山)등지에 집성 마을을 형성하고 인근 각지에 널리 퍼져살고 있다.


 또 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 김성부(金成富)는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올랐고 태조가 왕위 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이어할 때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였다가 3년뒤 태조가 환도할 때 수행치 않고 함경북도 길주 땅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치고 그의 아들인 조산대부(朝散大夫:고려 문산계 종5품,1356년(공민왕5)에는 종4품)로 밀양교수(密陽敎授:문과 출신 관원중 전적등을 교수로 임명했으며 조선때는 종6품)를 지낸 김경도(金敬道)는 함경남도 단천 고읍(古邑)에 정착하여 지금의 단천군 하다면 금안동 15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밖에 단천군 내 이중(利中), 광천(廣泉), 신숙(新宿) 등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접한 이원(利原), 북청(北靑), 풍산(豊山), 성진(城津) 등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

그리고 좌의정파조(左議政派祖) 김성룡(金成龍)의 후손은 현재 경기도 이천 등지에 퍼져 살고 있고, 별장공파조(別將公派祖) 김성려(金成呂)의 후손은 평안도에  살고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58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35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68명,역과에 14명,의과에 5명,음양과에 6명,율과에 2명,주학에 1명 등 289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들성과 일선김씨합한자료>

선산(善山)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옛 지명으로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이 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숭선군(崇善郡)으로 개칭하였고 군위현(軍威縣)과 효령현(孝靈縣)·부림현(缶林縣) 등을 관할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4) 선주(善州)로 개편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一善縣)으로 승격되었고 후에 선주(善主)로 다시 승격하였다.


서기 1413년(태종 13)에 선산군(善山郡)으로 1415년에는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화의(和義)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선산군이 되고 이듬해인 1896년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선산면이 신설되고 1979년에는 선산면이 선산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선산군이 구미시에 통합되었다.

                                              선산김씨(들성김씨 현대인물)

김형목(金炯穆) : 해청학원재단이사장

김우동(金雨東) : 국회의원,

김영조(金永祚) : 대구시의회 초대의장

김익교(金翊敎) : 국립묘지관리부사장 부이사관

김탁교(金卓敎) : 육군준장

김교식(金敎植) : 해군준장 ,김사준(金思濬) : 해군준장

김승목(金承穆) : 국회의원

김병진(金炳珍) : 대림그룹회장

김종호(金悰鎬) : 해군참모총장, 대장

김계조(金桂祚) : 서울市용산구의회의장

김상조(金尙祚) : 서울지방철도청장

김철용(金徹容) : 항만청장

김정국(金正國) : 김천시의회의장,김상호(金尙鎬) : 군수,김명호(金鳴鎬) : 군수

김정국(金正國) : 김천시의회의장

김명자(金明子) : 국회의원

김재희(金載熙) : 대구직할시 경찰청장

김재곤(金載坤) : 안기부 부이사관

김대원(金大元) : 변호사,김성철(金成喆) : 변호사

김익교(金翊敎) : 국립묘지관리부사장 부이사관

김지선(金芝善) : 판사

김규형(金奎亨) : 행시합격 서울시청

김홍규(金洪奎) : 관세청장

김상규(金相圭) : 미 극동사령부수석고문

김익동(金益東) : 육군소장

김상조(金相祚) :전 경상북도지사

김 덕(金 悳) : 부총리 경제학박사

김사홍(金思鴻) : 서울시중구의회의장

김운조(金雲祚) : 이사관 상공부

김연조(金演祚) : 외환은행전무이사

김석조(金碩祚) : 국제변호사

김관용(金寬容) : 구미시장.현 경북지사

김재백(金載栢) : SBS이사 기획본부장,김성조(金晟祚) : 국회의원

김이조(金利祚) : 이사관 국무총리실 인문사회기획국장,김완호(金完鎬) : 행시합격 삼미주택중역

김영조(金榮祚) : 행시합격 법학박사,김기동(金基東) : 대검찰청 검사

김성조(金成祚) : 행시합격 중앙청기획예산처사무관,김면호(金冕鎬) : 경북산업대교수

김재훈(金載勛) : 농학박사 교수,김적교(金迪敎) : 카이스트 국제경제연구원부원장

김희교(金希敎) : 의학박사 비뇨기과원장,김교준(金敎準) : 충남대농대학장 농학박사

김희규(金凞奎) : 영남대 교수 사무국장역임,김 수(金 秀) : 대구시교육원장

김재주(金載周) : 통계학박사,김승찬(金承粲) : 부산대교수 문학박사

김학조(金學祚) : 의학박사,김재명(金載明) : 경희대 의학박사

김승화(金承華) : 교육학박사 EBS부원장,김규인(金圭仁) : 技正 건축기술사

김광조(金光祚) : 통산산업부 생산기술연구원 교수,김무교(金茂敎) : 치의학박사

김유조(金有祚) : 건국대부총장 영문학박사,김 수(金 修) : 의학박사 정형외과전문의

김흥대(金興大) : 영남대의대학장 의학박사,김규태(金圭太) : 의학박사 경북대교수 흉부외과장

김강조(金康祚) : 서울대교수 의학박사,김승조(金承祚) : 경영학박사 부산대교수

김홍국(金弘國) : 한의학박사 홍국한의원장,김영철(金英哲) : 의학박사 비뇨기과원장

김준기(金準祺) : 의학박사,김승범(金承範) : 아주대 경제학박사

김영조(金永祚) : 유한전문대 교수,김승조(金承祚) : 공학박사 서울공대교수

김상기(金庠祺) : 안동대문리대학장 박사,김창호(金昌鎬) : 문학박사

김교봉(金敎鳳) : 문학박사 계명대교수,김창호(金昌鎬):문학박사,김승진(金承辰) :영남대공대교수

김순희(金順姬) : 문학박사 영문학교수,김승동(金承東) : 진주대교수

김 철(金 哲) : 공학박사 국민대교수,김혈조(金血祚) : 영남대사범대학장 문학박사

김중호(金中鎬) : 한의학박사,김응교(金應敎) : 공학박사 구조기술사

김규호(金圭昊) : 의학박사 미국 텍사스주립대졸,김영묵(金英) : 한밭대 토목공학부 교수

김교숙(金敎淑) : 부산외국어대 법학교수,김사열(金思悅) : 이학박사

김재황(金載晃) : 의학박사 영남대의대교수,김교원(金敎原) : 경북대교수

김성조(金性祚) : 한국산업인력공단전문학교교수,김규진(金圭鎭) : 금속공학박사

김사엽(金思燁) : 이학박사,김승국(金承國) : 영남대 조경대교수

김대운(金大雲) : 의학박사 산부인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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