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28)온양방씨(溫陽方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온양방씨 조형물.전면/대전중구

 작품명 家傳忠孝 世守敦睦(가전충효 세수돈목) 향(向)

조각가 이태근(대전조각협회, 한국예술협회원) 작품설명 온양방씨 가문의 휘장이다 중앙을 구심점으로 하여 각 방향으로 힘차게 솟아 오르는 기상과 약동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쪽에서 보아도 방자이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온양방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온양방씨 유래>

방(方)씨의 비조(鼻祖)는 방뇌(方雷)이시다. 고대 중국의 유망황제께서 장자 뇌 공(雷 公)을 하남성 방산땅에 방산군(方山君)으로 봉하게 됨으로서 방(方)씨로 득성 천하의 방씨 비조가 되시었다(기원전 2357년) 우리나라에서의 방(方)씨의 시조(始祖)는 휘(諱)는 지(智)요 자(字)는 천경 호(天慶 號)는 월봉(月峯) 또는 화천(花川)이시다. 선생은 신라 문무왕9년(서기669년) 당나라 한림학사의 신분으로 신라 조정의 초빙에 의하여 황명을 받아 문화사절로 오셔서 육체구경(六體九經)을 완석 저술 훈도하신 문조(文祖)이시며 선생께서는 오성위(五聖位) 18현과 같은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어른이시다 조정의 권유로 장(張)씨로 배필로 맞아 상주 지방을 봉작받고 관향을 상주로 삼으시고 세거 하셨다. 중시조(中始祖)는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공이시다 공은 고려 건국공신으로서 고려 광종 14년 (서기903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에 오르시고 성종 14년에 정1품의 특별관작인 온수군의 봉작과 아울러 온양 아산 신창 삼읍을 사패지로 받아 과안산에 복거하시니 그산이 배방산으로 명명되었으며 그 후손이 온양일대에 살게되어 본관을 온양으로 삼았다. 공이 온양방씨의 1세이시다. 온양 방씨는 온양에서만 육군(六君)(온수 온양 온창 온천 온성 온안)의 봉작을 받은 후 예로서 상주와 온양은 방(方)씨의 성지이다 후손중 12세 휘 우선 하남후작 문정공(于宣 河南侯爵 文定公) 께서는 4형제를 두셨고 넷째 아들 태상경공의 휘 방유공이시다.

공께서는 고려 충렬왕때 큰 군공으로 군위(軍威)을 사패지로 받음으로 온양에서 분관되어 그 후손들이 군위를 본관으로 삼았다. 14세 휘 언휘공(彦暉公)께서는 고려 충목왕의 국구가 되어 온천 부원군의 봉작을 받고 공민왕께서 복부성을 축성케하여 배방산성으로 명명하셨다 태종 숙종 영조께서는 방성(方姓)을 황민(皇民)으로 예우하라는 교지를 내리신 바도 있다.방씨는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11군(君) 16재상을 배출하였고 15세 문의공(文毅共) 휘(諱) 순 공(恂 公)을 위시 모든 세록지신들이 조선조 초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연유로 사패지를 몰수당하고 선영을 파괴 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18세 방효유정학(方孝孺正學)선생은 동양 팔대장부중 학문과 절개의 일인이며 만세의 충신되었고 청현신11명 공신 45명 명현신 86명 효자 54명 효열부13명 등 훌륭한 조상님을 모시고 있는 자랑스러운 가문이다.

근세에 이르러 방씨 가문의 큰별이 되신 소파 방정환(方定煥) 선생은 어린이들의 영원한 벗이요 겨레의 스승이며 선각자로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빛날 분이다.

 우리 방씨는 13세때에 7개파로 나누어 졌고 현재 30세손으로부터 42세손에 이르기까지 번창하고 있으며 숭조(崇祖) 충효(忠孝) 화친(和親)을 종훈(宗訓)으로 삼아 훌륭하신 조상님을 모시고 산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화합하고 단결하여 인류 문화 창달에 동참하고 있다 이에 전국종친들의 정성어린 뜻을 모아 뿌리공원에 이 유래비를 세우노라.

온양방씨 중앙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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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작가의 해설>

 

 

                                                <온양방씨 역대 인물 및 현대인물>

 방응모(1890~1950,1945년 조선일보 복간 사장).방일영(1923~2003)-조선일보 이사고문.

방우영(1928.1.22.평북 정주.방일영의 동생.연세대 경영학.1997년 연세대 이사장.2003년~조선일보 명예회장).방상훈-(조선일보 사장.방일영의 아들).방석준(대전 KBS기자).방대근(대전시 무형문화재).방춘옹(옹기기능전수자).방유석.영석 형제(장승 조각가).

 방석수(민노당 기조실장).방민준(한국일보 논설실장).방형남(동아일보 논설위원).방원진(4.19묘역).방만수(2대 국회의원).방극성(초대 고등법원 전주부장).방효복(전 군단장).방판칠(중장 예편).방순원(3대 청빈 대법관).방국진(원자력 산업회의 회장).방준필(6대 황해도지사).방성출(준장.국회의원).방선백(광주과학기술연구원 교수.세계인명사전 등재).방준필(고려대 과학정보관리부장).방우송(예원예술대교수).방영진(경희대태권도학 교수).방명걸(인권상받은 안티 포경수술전도사).방효창(두원공대 정보지원센터소장).방승양(국내 인공지능분야 개척자).방동인(한국 고지도분야 선구자).방승진(문제풀이의 대가).방석종(약학연구회 전 회장).방재욱(자생식물염색체연구 선구자).방성일(이동통신연구의 리더).방효충(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교수).

 가수 방주연.동동구루무 트로트가수 방어진.방성근(한국PD연합회장).방시혁(작곡가).방영섭(복음성가가수).방의석(50년대 영화감독).방의석(젊은 인디애니영화감독).방규식(최고령데뷔영화감독).방희준(젊은 연인들 작사한 치과의사).방용석('달려라하니'만든 애니메이션 음악 감독).방정식(뮤지컬배우겸 영화배우).방준석(한국영화음악의 리더).방상희(한가인 닮은 인터넷얼짱)

 방건호.방운혁(미스터코리아).방준영(수영국가대표감독).방승환(프라이드진출하는 파이터).방귀만(국내최초 IOC장학생).방덕원(농구선수).방선희(마라톤전도사).방승훈(자유형 아시아신기록).방성윤(농구스타).방신봉(배구선수).방대두(레슬링스타).

  방인관(관서지방 의병대장).방준경("김화산"으로 활동한 아나키즘 전도사).방애인(고아.걸인의 친구).방한암(상원사 지킨 선사).방한민(항일민족기자).방효원(최초 중국선교사).방순희(최초 여성 국회의원).방정환.방인근(예산출생.소설가).방영웅(예산출생."분례기" 작가).방순원.방기환. 방  희.방정복.방성규.방순동.방신영(조선요리법 개척자).방계성(신사참배 거부한 목회자).방태영(언론인).방의석(일제강점기 자동차 왕).방무길(신사임당 이은 여류서화가).방한준(30년대 사실주의 감독).방치규(함흥보통학교 동맹휴교 주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부인도 정경부인 방씨.백선엽장군어머니도 방씨.

방덕룡-(서기1561년(명종 16)∼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무신.

방유령-1460(세조 6)∼1529(중종 24). 조선 전기의 문신. .

방윤명-1827(순조 27)∼1880(고종 17). 조선 말기의 화가. 본관은 온양.

 방의용-1805(순조 5)∼? 조선 말기의 화가. 본관은 온양. 자는 성중(聖中)·원팔(元八), 호는 난석(蘭石)·난생(蘭生).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이상적(李尙迪)은 그의 임수독서도 (臨水讀書圖)를 보고 예찬(倪瓚)과 심주(沈周)의 옛 법이 배어 있다고 하였으며, 김석준(金奭準)은 그의 묘법(妙法)이 동원(#동48源)과 거연(巨然)에서 나왔다고 하였다.유작으로 간일(簡逸)한 문기(文氣)를 풍기는 묵매도(墨梅圖)(간송미술관 소장)

 방준경(1905∼1970)법률가. 본관은 온양. 서울출신. 경기중학교를 거쳐 192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사법관후보자고시에 합격하였다.1933년 공주지방법원판사로 임관되었고, 그뒤 부산지방법원·대전지방법원·인천지청 등의 판사를 역임한 후 1947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1959년 대법원판사, 1960년 광주고등법원장을 거쳐 1961년 다시 변호사개업을 하다가, 1964년 다시 대법원판사.

 방호의-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방정환-1912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 다음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新靑年), 신여자(新女子) 등의 편집을 맡았다.3·1운동 때에 오일철(吳一澈) 등과 함께 등사판으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박아 돌리다 체포 되었으나 곧 풀려 나왔다.이 해에 일본동양대학 문학과에 들어가 아동문학에 전심하는 한편 <어린이>를 창간하고, 손진태(孫晉泰) 윤극영(尹克榮)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처음으로 어린이 날을 정했다. 그 후 어린이를 위한 각종 단체를 결성하고, 강연회, 동화대회 등으로 일생을 보내다가 격무에 시달린 끝에 병사하였다.1957년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방씨(方氏)

 우리나라의 방씨(方氏)는 지난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 결성.경주.금성.김해.나주.남안.남양.남원.맹산.무안.수원.순천.해남.안산.안성.양산.오경.웅천.인동.충주방씨 등, 총 30개의 본관에 인구는 81,710명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나라 방씨(方氏)는 방지(方智)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삼황오제의 한사람인 중국 염제신농씨의 10세손 유망황제(楡罔皇帝)의 큰 아들 방뢰(方雷)가 중국 하남성 방산지방의 방산군(方山君)에 봉해져 지명을 따라 방씨(方氏)가 득성(得姓:BC 2357 년)하게 되어 방씨의 비조(鼻祖,원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온양 방씨의 시조인 월봉(月峰) 방 지(方智)는 중국 산동(山東)지방사람으로 비조 방 뢰의 133세손인 군강(君講)의 둘째아들이다.

 방 지(方智)는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정4품 벼슬)로써 서기 669년(당 고종2, 신라 문무왕 9년)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설 총(薛聰)을 통하여 구경대지(九經大旨)와 육례회통(六禮會統)을 밝혔으며,신라에서 유학(儒學)과 예교(禮敎)를 진흥시켜 체계를 수립한 동방유학의 문조(文祖)이다.

 시조 방 지는 장씨(張氏)와 혼인하고 가유현(嘉猷縣: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뿌리 내려 우리나라  방씨(方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방씨는 한.중 두나라로 자손이 갈리게 되었다. (문헌참고)

                                                          온양방씨(溫陽方氏)

                 방씨(方氏)를 우러러 보라며 배방산(拜方山)이라 명명(命名)

          신창.온양.아산 지역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준 땅)로 하사

                  1세조 이후 3대(代)가 정승 반열에 오른 명가(名家)

 온양방씨(溫陽方氏)는 시조 방 지(方智)가 상주에 정착하여 살았기에 상주(尙州)를 본관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후의 기록이 실전(失傳:묘지나 고적등이 대대로 전해온 사실을 알수없게 됨)되어

 후손인 방 운(方雲)이 온수군(溫水君:온수는 온양의 옛지명)에 봉(封)해짐에 따라 온양으로 개관(改貫)하고 방 운을 1세조로 받들고 있다.

1세조 방 운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의 견훤군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고 태조 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6대왕을 60여년간 섬겼으며,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 벼슬)을 거쳐 좌승지(左承旨:고려때 밀직사에 딸린 좌.우 승지와 부승지를 통틀어 일컫던 말) 등을 역임한 후

 서기 963년(광종 14년)에 좌복야(左僕射:고려 문종 때에 둔 상서도성 소속의 정2품 벼슬)에 이르렀다. 

그는 서기 992년(성종 13) 북경에 거란이 침입하자 77세의 노장으로 공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온양의 옛 지명)에 봉해졌고 성종이 그를 온양의 동팔리에 있는 과안산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방 씨(方氏)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산 이름을 배방산(拜方山)이라 명명(命名)하고, 온양을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리어,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하던 고을)으로 내리고 온양일대인 신창.온양.아산 지역을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준 땅)로 하였다.

 

 

 

 

 

 

 

 

 

 

 

 

 

 

   
                                                시조 월봉 방지(方智) 묘역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친 온양방씨(溫陽方氏)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文定公) 방우선(方于宣)과 그의 아우 방우번(方于番), 목사(牧使:정3품) 방득세(方得世)의 아들 대(代)에서 장암공(壯岩公) 방 서(方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와 간의대부(諫議大夫) 방 현(方縣)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방 훤(方暄)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방적(方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방우번(方于番)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평장사(平章事:상서도성의 정2품 부총리급) 방신제(方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 公派),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방신우(方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 되었으나,

   
                    중시조 온수군(溫水君) 방 운(方雲)의 신단

안렴사공파 방훤(方暄)과 상락부원군파 방신우(方臣佑)는 절손(絶孫:대를 이을 자손이 끊어짐.무후)되었고 현재는 5파만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방씨(方氏)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종1품 정승)을 지낸 방중탁(方仲鐸:방운의 아들)과 현종때 중랑장(中郞將:정5품 무관벼슬)으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방 휴(方休:방 운의손자, 방중탁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방 휴의 증손 방 유(方裕)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 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 차관)에 이르러 대호군(大護軍:정3품 최고군직)을 지낸 아들 방 재(方宰),대제학(大提學:2품.문형)에 오른 증손 방희진(方曦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대제학 방희진 묘역

조선때의 인물로는 성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보던 정기 과거시험)에 급제한 방유영(方有寧)이 중종때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 으뜸 종2품.검찰총장)을 거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종2품 차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지냈으며, 방우고(方祐固)과 방 옹(方翁)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떨쳤다.

 순조때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정주성(定州城)함락에 공을 세웠던 방우정(方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방기전(方基典)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은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빨래 광주리에 숨겨 돌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아동문학에 전심  <사랑의 선물> <어린이>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

 그외 방윤명(方允明)과 방천용(方天鏞), 방한익(方漢翼), 방건홍(方建洪),방무길(方戊吉) 등이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쳐 문.무(文武)의 전통을 이은 온양 방씨를 빛냈다. 


온양방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 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대과)에 8명,무과(武科: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0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4명,

 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49명,의과에 36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3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 가지)에 4명,주학에 3명 등 모두 13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온양방씨는

 1985년에는 총 17,933가구에 인구는 75,290명이었고,
지난 2000년에는 총 19,961가구에 인구는 64,128명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상주방씨.신창방씨.군위방씨는 모두 같은 뿌리라며 <온양방씨>로 합본 되었다.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탕정군으로 강등되었으나 음봉현(陰峰縣).기량현(祈梁縣).평택현(平澤縣)을 영현으로 관장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으며 1414년(태종 14)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현(溫昌縣)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1441년(세종 23)에 왕이 온천에 행차한 후 병에 차도가 있어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이곳 온천에 자주 행차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온양군이 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에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온양군은 아산군.신창군과 함께 아산군으로 통합함으로써 폐지되었다. 1941년 관할 군내면.서면.읍내면을 합해 만든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에 시로 승격 아산군에서 분리되었다가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소파 방정환 동상

                                   <천방지축마골피> 는 크게 잘못된 통설

  한국의 성씨(姓氏)에는 잘못된 통설이 많다.

  성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는 겨레붙이의 호칭이며,단계혈연집단의 명칭으로 혈족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중기이후 신분제의 동요로 상민들이 돈을 주고 현달한 다른 족보에 이름을 올린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희성임에도 겨레붙이의 칭호를 자랑스럽게 고수해온 단계혈연집단이 바로 희성씨이다.   "천방지축마골피"도 희성씨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 희성씨가 종원수가 상대적으로 적다하여 천계(賤系)인 것처럼 말하지만 근거가 전혀없는 호사가들의 악의적 통설이다.

 18세기 이후 탁보(잘못된 족보)가 성행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희성씨를 마치 천계인것처럼 퍼뜨린것이다.

   실제 성씨도 명멸이 있는데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인구조사 때 당시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성으로 사용하는 두 경우가 있는데 천(天)씨는  밀양 등 5개 본관에 1300여명이 있고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역시 천계가 아니다. 다만 종원수가 적다보니 급제자도 적을 뿐이다.

  영양천씨(潁陽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장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아 이 또한 천계가 아니다. 아무리 양반 가문이라도 3대가 출사하지 못하면 상민이라 했다.

  방씨의 대표격인 온양방씨(溫陽方氏)의 경우 중흥시조 방 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군(溫水君,온양의 옛지명)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온양방씨는 역대에 현달(顯達,입신출세)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남양 방씨(南陽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정1품)에 오른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방씨(開城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의 높은 벼슬을 지낸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가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지씨(忠州池氏)는 지용수(池龍壽)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때는 문과 급제자를 10명이나 배출하여 역시 천계가 아니며,또한 역사에 기록된 선현들이 수없이 많다. 이또한 호사가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것이 통설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례이다.

   
<배방산>배방산은 온양방씨와 관련이 많은 산이다. 충남 천안에서 아산으로 들어가는입구 뒷편에 있는 산으로,당나라 한림학사인 방지(方智)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6대의 왕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에 봉해지고 온양.신창.아산 3읍을 식읍(食邑:나라에 공이많은 사람에게 개인이 조세를 받아쓰게 하는것)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 팔동리 과안산은 <방씨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拜方山)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산북쪽 성재산에는 길이 약 1,500m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성이 있다.
대부분 무너져 돌무지만 보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배방산성의 둘레가 3,3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2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에도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여러곳에 잇으며 성내에서 백제시대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어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인 듯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한다.<문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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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공주고.고려대 경영학.한국과학기술원 수료.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인 선정).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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